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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그리엄마 Aug 23. 2021

엄마과학자 생존기 - 34화

34화. 같은 공간, 그러나 다른 체계

34화. 같은 공간, 그러나 다른 체계



지난봄, 할머니가 먼 길을 떠나셨다.

아이로썬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을 증조할머니의 부고였다.

오래 공부를 했던 손녀가 혹여 시가에서 구박을 받지 않을까,

흔히 말하는 위험한 시약을 많이 다루는 과학자인 손녀가 혹여 불임은 아닐까,

혹여 손녀가 아들을 낳치 못할까, 임신 중에 누구보다 심란해 했던 나의 두 할머니 중, 

마지막 남아 있던 친할머니의 부고였다.

이제 정말, 나는 할머니가 없다.


몇년 전 외할머니가 먼저 가셨을 때도 참 힘들고 심란했지만, 친할머니의 부고는 공허함이 더 컸다.

아무래도, 그래도 전엔 할머니 한분이 계셨다 보니, 데미지가 좀 덜했던 것 같다.

비록 외할머니는 떠나셨지만, 아직 난 친할머니가 남아 계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은 좀 달랐다.  난 이제 정말 할머니가 없게 되었다.

이제 나는 친정에 와도, 할머니라는 말을 쓸 일이 없어진 셈이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땡그리에게도 엄청난 이벤트였다. 예전엔 유치원 한곳에만 연락하면 되었던거지만 이제는 아이가 다니는 기관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예전 외할머니의 장례식때는 유치원에 부고를 전하고 특별한 서류 없이 그냥 그렇게 지나갔었다. 그러나 초등학교는 좀 더 복잡한 절차가 있었다. 물론 처음엔 몰랐다. 

나는 그냥 예전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아이 증조모상에 대해 부고를 알렸고 상을 치르기 위해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생각과는 달리 이슈는 생겼다. 


문제는 상을 치르던 둘째날이었다. 아이의 방과후 과정 선생님 한 분으로부터 항의성 문자를 받았다. 

사실 아이는 일을 하는 엄마를 둔 죄로, 수업 종료 후, 돌봄교실+방과후 과정+학원 트로이카로 구성된 돌봄을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사실상 엄마가 함께 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양육자가 믿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인 학교에서 최대한의 시간을 보내고, 그래도 안되는 나머지 시간을 태권도학원을 통해 돌봄을 보장받고 있었다. 학원과 학교에 연락을 했고, 당연히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정규수업-돌봄-방과후 수업까지 연락이 당연히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학원에 부고를 알린 뒤 정신없이 상을 치르던 중, 아이의 결석을 질타하는 뉘앙스의 문자를 받게 된 것이다. 문자엔 짜증이 묻어났다. 상을 당했다고 하는데, 무단결석이 없게 해달라는 요지였다. (니가 상을 당했는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결석을 할거면 미리 말해줘야 하는거 아니냐?는 뉘앙스라 매우 기분이 불쾌했다). 


순간 화가 났다. 마치 상을 당해 결석한 이 상황을 비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만의 느낌인가 싶어 장례식장에 모인 아이의 이모들과 삼촌들의 자문을 받았지만, 다들 공통적으로 비난받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를 맡겨야 하는 입장, 혹시라도 아이가 피해를 입지 않을까 고민을 거듭하다 나 역시 답장을 했다.  아이가 증조모상으로 인해 결석한 것을 비난하는 듯 한 어조라 불쾌했다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여차하면 방과후 수업을 취소할 각오를 하고 내지르고 난 뒤에야 영혼없는 사과를 받을 수 있었다.


방과후 교사와 문자로 싸운 덕에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내가 아이 증조모의 부고를 학교에 알렸지만, 이 사실이 돌봄교실에는 전달될 지언정, 방과후 교실에는 전혀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칙대로라면 돌봄교실에도 전달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학교, 돌봄교실, 방과후교실은 전혀 다른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별개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래서 아이의 방과 후 선생님은 아이의 무단결석이 불쾌하여 항의했고, 그 항의성 문자를 상을 치르던 중에 받은 나는 화가 났던 것이다. 


의문이 들었다. 분명 같은 건물 내에서, 학교의 시스템으로 신청을 받아 운영되고, 방과 후 선생님들 역시 학교에서 면접을 보고 채용을 하는 것으로 아는데, 왜 아이의 상황은 공유될 수 없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같은 건물 내에서 아이들을 케어하는 시스템인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 모든 것은 별개의 시스템이므로 아이의 상황은 전혀 공유되지 않는다. 다른 시스템이므로 당연히 아이의 상황을 공유를 해야 할 근거도 없을 것이다. 아이의 담임선생님은 그 시스템 중 한곳에 나름의 배려를 담아 전달해준 것 뿐, 이 모든 것은 부모인 내가 알아서 연락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 부모들의 마음이 비슷하겠으나, 수업 종료 후 진행되는 다양한 학교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이유는 하나다. 아이가 가장 안전하게 보호 받을 수 있는 곳이며, 같은 공간이기에 아이의 상황이 잘 공유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아프면 아픈대로, 다치면 다친대로 말이다. 


학교라는 공간이 부모로써는 아이를 케어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공간이란 셈이다. 그리고 당연히 아이를 케어하기 위한 기본적인 정보, 특히나 부고로 인한 결석이나 이런것들 혹은 아이가 아파서 결석을 하는 경우 등은 아이가 참여하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공유가 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뭔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기분이었으나, 일단 아이의 정보가 공유가 안된다 하니 나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결국 나는 상을 치르는 정신없는 와중에 아이의 방과후 학습을 담당하는 선생님들에게 일일이 연락을 하여 우리의 부고를 알려야했다. 그나마 내가 손녀 정도 되는 상황이니 정신이 멀쩡했지, 만약 직접 내 배우자나 아이가 사망하는 경우라던지 혹은 아이가 상주가 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때도 아이의 양육자에게 연락하여 출석 관리를 해달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이의 출결 정도는 공통적으로 공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일까? 아이의 알레르기 현황, 출결 정도는 부모가 일일이 찾아다니며 서류를 제출하지 않고 공유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다. 공유를 하지 않는 기본적인 이유가 혹시 각자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나눈 것이라면? 만의 하나 사고가 발생했을때, 누구의 책임인가를 묻기 위한 대한민국 고유의 시스템 때문이라면? 나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아이가 학교 수업이 끝난 뒤, 학교 안에 있는 돌봄교실에서 놀다가 다쳤다. 혹은 아이가 방과후 수업을 하던 중에 다쳤다. 그렇다면, 아이는 보건실에서 케어를 과연 받을 수 있을까? 아니 정규수업이 끝난 뒤, 학교안에서 다친 아이는 어떻게 케어 받는 것일까? 아니 케어를 받을 수는 있을까? 응급처치는 받을 수 있는 것인가? 각자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면 아이는 왜 학교 안에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 만약 하교 후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가 침입한 외부인으로 인해 상해를 입는다면 말이다.


이 모든 것의 책임을 아이를 케어하지 못한 부모에게 돌릴 것인가? 아니면 피해를 입은 아이에게 돌릴 것인가? 아니, 책임을 묻기 전에 만의 하나라도 생길 수 있는 사고가 발생한다면, 각자 도생으로 꾸려진 이 시스템이 아이를 각자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은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학교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설령 각자 시스템이 다르다 할지라도, 돌봄주체인 아이들을 케어하기 위해 함께 Co-work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이들의 상황이 잘 공유되고, 만의 하나 다같이 안전하게 탈출을 하거나 혹은 아이들이 안전하게 케어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상황은 아침에 다르고 저녁에 다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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