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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애틱 Aug 05. 2021

어느 직장인의 터프한 아프리카 여행기 2

포토에세이 zoo is noT enOUGH #2



아무 길이나 알려준 아저씨에게 탈탈 털려 탈수 직전까지 갔다 왔다. 도가니까지 나갈 뻔한 하이킹은 요망한 객기가 빚어낸 참사다. 서둘러 케이블카로 향했다. 짙푸른 색 하늘에는 가느다란 선들이 늘어졌다. 


깃털처럼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높아지는 고도를 따라 기압 차를 맞추는 소리가 귀에서 뻑뻑 들렸다. 먼발치 아래로 탐험가 정신을 맛보다 방울뱀에 물려 세상 하직할 뻔한 길이 보인다. 케이블카 창문 너머로 수직으로 내달리는 절벽이 가까워졌다. 가만히 보니 콩알만 한 암벽 등반가들이 다닥다닥 붙어 기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패기가 용맹스러웠다. 


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누군가 있었다.

'어, 길이 없는데 잘도 올라가네... ' 계속해서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세명의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뚱한 길을 알려준 아저씨는 사실 잘못이 없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저렇게 누군가에게는 어떻게든 갈 수 있는 길이  테니까.


테이블 마운틴으로 솟아오르는 케이블카를 타고 말았다.
용감무쌍한 암벽 등반가를 안전한 케이블카 창문 너머로 봤다.
험로를 개척하는 삼총사 (사진 하단에 있어요. 확대 또는 모니터 추천)
거기까지는 어떻게 올라가신 거요? (사진 중앙에 삼총사가 있어요. 확대 또는 모니터 추천)



풋내기가 회사에서 마주했던 캐릭터는 다채로웠다. 투박했지만 혼내면서 다 가르쳐 주던 막걸리 부장, 옆동네 친한 아저씨처럼 열심히 응원해주던 키다리 부장, 하나하나 조곤조곤 친절하게 설명해주던 빼빼로 차장, 잔정이 많아 식사까지 곰살맞게 챙겨주던 곰돌이 과장, 그러거나 말거나 무관심한 무뚝뚝 과장이 있었다. 알길 없는 비위에 하나라도 거슬리면 불같이 소리를 지르던 똥자루 부서장, 에 대한 과장된 평가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안하무인으로 표출되는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앓는 나르시스 도 있었다.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다양한 성격 사이에 뜻밖의 공통점이 있었다. 각자 옳다고 믿는 길을 가르쳐 주려던 했는 거다.


나는 눈을 가리고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들판의 허수아비였다. 거센 비바람을 피할 줄도 막을 줄도 몰랐다. 옳은 길인지, 다른 길인지, 틀린 길인지 고민은커녕 정신을 잃어버린 허깨비. 방울뱀을 용감무쌍하게 물리치고 절벽을 기어오를지, 방울뱀에 물려 꿈과 모험가의 이름으로 요단강을 건널지, 얼른 방향을 틀어 케이블카로 향할지는 내가 정할 수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잘 처신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밀려왔다. 에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제부터 알면 됐지.






케이블카의 문이 열렸다. 대서양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몰려가슴속 끝까지 바람을 밀어 넣었다. 마음이 활짝 트이는 기분이었다. 케이프타운이 한눈에 보였고 워터프런트장난감 마을처럼 보였다. 바다는 끝도 없었다.


낯선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바위를 의자 삼아 책을 읽는 중년 여성이었다. 생경한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경치 좋은 어느 곳 어디에서도 책을 읽는 사람을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는 넘쳐나는 감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카메라 뷰파인더에 얼굴을 파묻고 계셨다. 내 머리가 백발로 가득한 날에는 꼭 이런 여유를 간직한 모습을 닮고 싶었다. 인생을 온몸으로 즐기는 그분들의 잔잔함을 두 눈에 오래도록 담았다.


대서양의 끝자락이 닿아있는 해변가는 캠스베이였다. 할리우드 배우들의 별장이 많은 곳이라고 했다. 간혹 스타 배우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고 했지만 우리나라 배우도 못 알아보는 판에 알게 뭐냐. 다음 목적지를 정하고 테이블 마운틴을 내려왔다. 길을 봐 뒀으니 제대로 하이킹을 해서 내려올까 생각했지만 소중한 도가니를 위해 케이블카로 향했다.


테이블 마운틴에서 바라본 대서양과 라이언스 헤드
테이블 마운틴에서 바라본 동서남북 중 한 곳.
테이블 마운틴에서 바라본 남아공
테이블 마운틴의 정상은 이렇게 편평했다.
노부부가 함께 테이블 마운틴을 관광하셨다.
바위를 의자 삼아 책을 읽는 중년 여성의 모습.
내 카메라 가방을 받침대로 삼으신 할아버지. 사진이 흡족하게 나왔으면 좋겠다.
사진을 하나라도 더 나누고 싶은 마음에 여러장. 사진을 더 보고 싶으시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aka. 댓글 가뭄)
멀리 보이는 캠스베이. 이제 목적지는 저기다.



케이프타운을 돌아다니는 hop on-hop off 시티투어 버스 티켓을 샀다. 노선 내 원하는 곳에서 깡충 내렸다가 아무 때나 깡충 탈 수 있는 버스다. 빨간색의 이층 버스를 타고 시내 곳곳을 다닐 수 있다. 노선은 크게 두 갈래다. 테이블 마운틴과 캠스베이로 가는 루트가 있고, 다른 루트는 세상의 끝이라는 희망봉을 향하는 루트가 있다.


케이프타운 여기저기에서 만날 수 있는 깡충 거리길 종용하는 빨간 버스



캠스베이는 멋진 곳이었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떠올릴 만큼 세련된 해변가였다. 구체적인 영화 속 한 장면을 떠올리고 싶었다. 새붉은 수영복을 입은 여성 구조대의 풍만한 상반신이 클로즈업되며 슬로우로 뛰어가는 장면이 압권인 베이워치 (일명 SOS 해상 구조대) 장면만 떠올라서 교양의 함양이 시급하게 느껴졌다. 탁 트인 대서양에서 몰아치는 파도는 난폭했다. 파고가 어른 키보다 높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얕은 해변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 많았다. 그리고 놀라운 모습이 이어졌다. 가슴을 훤히 드러낸 여자가 남자 친구 옆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보이긴 했지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개방적인 도시스러움을 표방하며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고 해변의 여유를 즐기려는 시크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혹시 그 모습을 찾기 위해 급하게 대형 모니터 앞으로 자리를 옮기실 분들을 위해 미리 알려드려야겠다. 사진은 찍지 않았으니 아쉬움은 뒤로 해놓으시길...


바다 위로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 해변가 카페의 파라솔에 앉아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 가족끼리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 땀 흘리며 비치 발리볼을 하는 사람들. 원반 던지기 놀이를 하는 사람들.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 나른하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가슴을 드러낸 여자. 아, 이건 아니다, 아무튼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변가의 풍경에 녹아 있어 무척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다.



캠스베이 해변 안내판
대서양의 끝자락에는 어른 키만큼 높은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앞에는 대서양 뒤에는 테이블 마운틴, 그 사이에 놓인 곡예사
파도와 술래놀이를 하는 아기와 아빠
바다를 즐기고 있는 아기와 엄마 아빠.
노을 속에서 비치 발리볼을 즐기는 사람들
바다를 마주 보는 펍과 레스토랑들
할리우드 스타의 별장일까?



그런데 아프리카를 온 후부터 계속해서 불편한 뭔가가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 있었다. 해변가의 자유분방한 공기를 맡고서야 실체를 어렴풋 알다. 부자연스러움이었다. 바다만큼 펼쳐진 자유로운 시간이 주어졌지만 멍석을 깔아도 놀 줄 모르는 촌뜨기. 시크한 도시 남자는 무슨, 아프리카에서 얼어 죽을 일이다. 이제 겨우 피가 돌기 시작한 자존감이, 숨을 쉬기 시작한 행복이 살아나면 다시는 짓밟히게 방치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남아프리카의 공기 중에는 습기나 먼지가 없는 것 같아 무척이나 투명하게 느껴졌다. 그림자는 이미 2미터는 길어진 듯하다. 게스트 하우스로 돌아가는 길은 걸어서 약 40분 정도가 걸리는데 서둘러 돌아가면 해기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황금색 저녁노을이 온몸을 기분 좋게 감싸주고 있다. 다리도 기분 좋게 뻐근하다. 문득 신나게 뛰어놀다 집으로 돌아갈 무렵 어린아이의 시간으로 돌아간 듯했다. 학교나 회사를 다니는 동안, 저녁 이 시간대만이 주는 느낌이 얼마나 포근하고 아늑했는지 잊고 있었던 것 같다. 탁하고 뿌연 어른의 공기가 어린 시절의 기억마저 뿌옇게 만들어 버린지도 모르겠다.


벌써 짙은 남색의 공기가 주변에 내려앉았다. 카메라 가방을 점검하고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겼다. 낯선 길들이라 몇 차례 걸음을 멈춰 주변을 돌아봤다. 길 더듬기를 반복한 끝에야 눈에 익은 길이 나타났다. 가게에서 저녁에 먹을 빵과 다음 날 아침으로 사과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맥주가 원래 목적이었으니 빠뜨릴 수 없다. 철조망과 무거운 철문으로 밀고 숙소로 들어오고 나서야 안도감이 스르르 풀려나왔다. 오늘 여행을 마친 게스트 하우스의 사람들은 시원한 맥주를 이미 들이켜고 있었다. 계속.




* 갇힌 곳을 떠나 싶은 자유로움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zoo is noT enOUGH (동물원으로는 부족해)의 대문자를 따와 '어느 직장인의 터프(tough)한 아프리카 여행기'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동경했고, 사진에 미쳤고, 아프리카를 꿈꿨던 그때로 돌아갑니다. 내용은 모두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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