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 도하의 공항 화장실에 자취를 남기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까만 머리 까만 눈의 사람이 온몸이흑진주 색인 사람의 나라에 떨어졌다. 인근 수 키로 내에있는 유일한 동양인인 것 같았다. 그들 역시 낯설었는지 힐끔 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미리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에서 픽업을 나왔다. 역시 흑인이었다. 30년 치 먼지 떼가 쌓인 구형 메르세데츠 벤츠 W124 가 굴러가는데 지장이 없을만한 실내 부품은 몽땅 팔아먹은 단출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인 일정 없이 시작하는 아프리카 여행은 구체적인 일정 없이 사표를 내던진 앞으로의 내 인생과 닮아있었다.
퇴사 의사를 통보했을 때였다. 뜻밖이었을 테다. 바닥에 눌어붙은 껌딱지보다 낮아진 자존감에 숨을 불어넣어야 했다. 뒤통수 일격을 맞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에서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아바타인 줄 알았는데 오작동이 났으니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여러 면담이 줄줄이 달려왔다. 사장은 3개월 휴직 제안으로 회유했고 똥자루 부서장은 회사에 대한 책임의 끈을 건네며 죄책감을 갖도록 옭아맸다. 하지만 의지하고 따랐던 직장 선배들의 조언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은 후였다. 손아귀에 힘을 꽉 주고 내 인생에 대한 책임의 끈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제는 똥자루 이하 네놈들 성화에 주눅 들지 않겠고 다짐했다. 그래 이놈들아, 이제는 내 인생에 책임을 좀 져야겠다! 마음이 벌써 아무는 것 같았다. 박힌 가시를 빼낸 느낌이었다. 욱신거리는 생채기가 여물려면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나를 이기적이라 말했던 이 똥자루는 이로부터 수년 뒤 회사자금 횡령 혐의로 권고사직형 명예퇴직을 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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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케이프타운 또는 요하네스버그 공항을 이용하는 거였다. 케이프타운은 아프리카의 여러 도시에서 상대적으로 치안이 안전한 곳이라 했다. 요하네스버그는 공항 밖 백주대로에서 강도를 당한 경험담을 들었다. 내가 지켜야 할 목록을 따져봤다. 캐논 5D 마크 2, 캐논 EF 70-200mm F2.8L 렌즈, 탐론 28-75mm F2.8 렌즈, 메츠 54-MZ4 플래시, 삼각대, 노트북 정도였다. 내셔널지오그래픽을 동경하는데서 시작한 아프리카 여행인데 카메라가 없어지면 뒷동네 마실 나가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요하네스버그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시작은 무난히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에 위치한 케이프타운을 기점으로 여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세부 계획은 세워두지 않았다. 다음 나라 일정 정도만 생각해 두기로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 나미비아 - 잠비아 - 탄자니아 - 케냐 정도가 될 거였다.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해서 만난 관리인은 예쁘장한 젊은 백인이었다. 지금까지 동양인은 유일한 탓에 걸리버 여행기 속 라퓨타 섬에 도착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었다. 우리 집 거실에 널브러져 있던 옷가지, 라면봉지, 노트북, 카메라, 신발, 잡동사니들이 배낭에 넣어졌던 역순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낯선 공간에 펼쳐진 익숙한 물건들이 오히려 내가 멀리 떠나 왔다는 걸 실감하게 해 주었다.
짐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게스트 하우스에는 같은 숙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들이 구석구석에 있었다. 좀 삐죽삐죽 거리 기는 했지만 쉽게 환경에 스며들 만큼 안락했다. 유럽, 북미에서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과는 맥주 한 병으로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은 휴가를 내서 왔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긴 휴가를 쓰는 게 불가능해서 아예 회사를 관두고 왔다고 하니 멋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들에게 아프리카는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비장한 각오로 온다는 느낌보다 가볍게 즐기러 오는 정도의 느낌인 것 같았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외국인 속에 둘러싸인 모습이 왠지 글로벌 해지는 것 같아 사진을 찍어 본다. 몰골이 흉하다. 서둘러 사진을 지웠다. 회사를 관둔 짧은 시간 동안 살이 많이 붙어 있었다.
케이프타운에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모습
다음 날부터 사흘간 케이프타운의 명소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인종차별 타파를 위해 싸운 만델라의 자취, 흑인 노예가 성행하던 과거의 잔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행정 수도까지 감상할 수 있는 상식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괜한 고상함에 여행의 자유를 잃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 쿨하게 웃어넘긴다.왠지 슬프고 외롭다.
흑인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의 기사가 실린 신문이 액자형태로 벽에 전시되어 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세계 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 넬슨 만델라의 벽화
케이프타운 관광객?
길을 다니면서 지갑을 날치기당하지는 않을까, 카메라를 꺼내 들어 강도의 표적이 되지는 않을까 온갖 노파심이 든다. 그러나 낮에는 관광객들이 많아 걱정할 만큼 위험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좀 더 대담해지고 있었다. 길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부스럭 부스럭 렌즈를 바꿔 끼우고 있었다. 길을 가다 보신 아주머니께서 말을 건네신다. “어쩌고 저쩌고... " 아프리카 특유의 억양이 섞여 있어 잘은 모르겠지만 표정과 뉘앙스에서 지금 뭐 하는 거니! 도둑맞을 수 있으니까 이런 데서 그런 거 하면 위험해,라고 걱정을 해주시는 눈치였다. 관광객을 염려해 친절하게 말씀 주신 것에 감사의 표시를 유창하게 했다. "땡큐 베리 머치".
케이프타운의 시내 전경
케이프타운의 시내 전경
케이프타운의 구석구석
케이프타운 구석구석
케이프타운 구석구석
케이프타운에서 교통 신호등은 의미가 없었다. 건널목의 파란불을 믿고 길을 건너다가는 횡천길을 신속히 질러갈 수가 있었다. 빨간불에 마냥 서 있는 것도 어리석었는데 휑 지나가는 옆사람 때문에 덜렁 남은 사람이 민망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요령껏 둘러보고 건너야 했다. 낯선 도시를 걷다 보면 내가 속한 이곳은 매트릭스 속의 프로그램이 아닐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낯선 남자에게서 모피어스의 향기가 강하게 느껴질 때는 더욱 그렇다.
누구를 위한 파란불인가, 케이프타운 건널목
케이프타운 매트릭스 설. 모피어스 목격 (초상권 죄송합니다)
케이프타운은 유럽 식민지 지배 시절의 영향을 받아 유럽풍 건축양식을 보인다고 했다. 여기저기 길을 다니다 보니 걸어서 세계 속으로 에서 주로 보던 건물들이 제법 보이는 것 같다. 유럽 남아공 1+1 여행을 하는 듯하다.
케이프타운 유럽풍 양식 건물. 더는 몰라요.
케이프타운 유럽풍 양식 건물. 더는 몰라요.
케이프타운 유럽풍 양식 성당. 더는 몰라요.
케이프타운 유럽풍 양식 성당 내부.
케이프타운을 돌아다니다 보면 어디에서나 꼭대기가 편평한 산이 보인다. 빙하기 때 얼음이 갈아놓은 편평한 지표면이 융기해서 식탁 같은 모양의 산이 되었다고 했다. 테이블 마운틴이라고 이름 붙여진 곳이었다. 고도가 높은지 정상으로 올라가는 위해서는 3시간 하이킹 또는 케이블카를 타야 한다고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가기는 난코스 일 것 같다.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하이킹을 해서 저곳을 올라갔다고 했다. 혀를 내두를 일이었지만 그간 달라붙은 지방 덩어리를 없앨 수 있겠다는 얄팍한 노림수에 하이킹을 시도하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하이킹 코스의 입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뙤약볕에 입구로 걸어가는 길이 너무 멀어 벌써 목이 탔다. 물을 꽤 많이 마셨다. 마침 여행객을 기다리고 있는 버스 기사 아저씨가 보였다. 하이킹 입구가 저기 화장실 입구 옆쪽으로 나 있는 조그마한 샛길이 맞는지 여쭤 보았다. 유창한... 나의 영어를 못 알아듣는 걸까? 그 역시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현지분이라 어영부영 대답하시는 걸까? 미심쩍어 재차 물어봤지만 맞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셨다. 좋아, 한번 해보는 거야! 샛길을 향해 올라갔다.
테이블 마운팅 하이킹으로 가는 길 (이 맞나요?)
테이블 마운팅 하이킹으로 가는 길 (이 맞나요?)
아프리카의 하이킹은 정말 자연친화적인 환경이었다. 사람의 흔적, 발길이라고는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원시의 자연 속으로 탐험을 떠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기분이 최고조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환상, 미지의 세계가 드디어 펼쳐지는 것 같다.
그런데 영화 127시간 보면 자연 속으로 탐험 떠났다가 팔 자르고 오던데. 영화 인투 더 와일드 보면 자연 속으로 탐험 떠났다가 그냥 죽던데. 주변을 훑어보니 한편에서는 자꾸 걱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저씨, 정말 이 길이 맞나요?
아저씨, 정말 하이킹 길이 아닌 것 같아요.
얼굴 모양의 바위였다. 눈. 코. 입 있을 건 다 있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본 방울뱀의 존재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방울뱀에 물리면 한방에 끝나던데. 사람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안 보이는 곳에서 어떡하지. 도와줄 사람도 없고 물통에 든 물도 거의 바닥이 났는데. 여기 환경을 보아하니 뱀 한 마리 없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은데. 안 되겠다. 일단 하산하자.
나중에 알고 봤더니 하이킹 길은 여기 조그만 샛길이 아니라 훨씬 더 앞쪽에 있었다. 안내 표지판도 커다랗게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나 좀 보슈, 아쟈씨.
케이블카로 발길을 돌리는 길엔 아까 그 노무 아쟈씨가 있었다. 자기도 민망함을 감지했는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꿎은 버스 계기판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울컥 열불이 터져 올랐지만 탈수 증세가 심해지는 것 같아 케이블카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계속.
* 갇힌 곳을 떠나고 싶은 자유로움을 말하고 싶었습니다.zoo is noTenOUGH (동물원으로는 부족해)의 대문자를 따와 '어느 직장인의 터프(tough)한 아프리카 여행기'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동경했고, 사진에 미쳤고, 아프리카를 꿈꿨던 그때로 돌아갑니다. 내용은 모두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꾸몄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