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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애틱 Aug 12. 2021

세상의 끝을 벗어난 수동 자동차

어느 직장인의 터프한 아프리카 여행기 #5 나비미아


아침 에 출발한 버스는 이튿날 아침 열시 도착했다. 예정된 스무시간보다 시간은 더 렸지만 어진 이유를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고 궁금해하지 않았다. 네시간 연착은 어지간한 수용 범위 안에 드는 모양이다.


밤새 팽팽 돌아가는 에어컨에 몸뚱이가 팽이처럼 돌돌 말렸다. 데없는 추위에 선잠을 잤더니 삭신이 비명을 질렀다. 실핏줄이 서 있는 눈이 따갑다. 빈트후크의 따듯한 햇살에 몸이 나 싶더니 더위가 들었다. 트레일러짐을 나눠 주느라 분주 사람들이 보인다. 짐을 받으러 향하는 길에 뜨거운 엔진바람이 아닥쳐 후끈하더니, 왕왕 돌아가는 엔진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갑자기 열댓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나 버스 주변을 에워싸더니 순식간에 도떼기시장처럼 번잡해졌다.


"택시!? 택시?? 택시!!"


손님을 서로 데리고 가려는 택시 기사의 경쟁 소리였다. 소란이 일어났다. 서로 손을 내대며 짐들을 가져가겠다고 난탕을 치는 것이었다.


"노우! 노! "

눈을 부라리며 짐을 지켰고 난리 통을 벗어나기 위해 버럭 질을 했지만, 본인 의사를 전달하느라 듣는 사람 대답 관심이 없었다. 사방에서 덤벼드는 손신경 곤두세웠다.  살기 위한 부림이라 함부로 대거리를 할  없는 노릇이었다. 회사 안이나 밖이나 살기 위한 몸부림은 아프리카에서도 이어지고 있었다.




터미널 인근 관광 안내소를 찾았다. 나미비아 여행에 쓸만한 지도를 챙기고 예약한 게스트 하우스를 향해 피난길을 이어갔다. 도로 주변에는 야자수가 늘어서 있었고 도시 복판에 있는 작은 공원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느긋하게 앉아 다. 평일이지만 짬짬이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좋았다. 터미널 난리 통에 혼이 나갔던 마음이 차분해다.

우리 직장인의 평일은 전쟁터를 연상시킬 만큼 회사일에 치열하게 임했고, 주말에는 미뤄놓은 여유를 작정하고 찾기 위해 핫플레이스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리고는 했던 것 같은데 여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우리도 언젠가는 워라밸이 회사가 베푸는 혜택이나 생색 섞인 배려가 아닌 삶의 일부로 스며들길 바랐다.


빈트후크 정갈한 느낌을 주는 도시였다. 독일 식민지의 영향을 받았다는 역사에 관한 고급 정보는 대범하게 생략한다. 곳곳에는 권총을 찬 무장 군인들이 보였다. 치안이 안전한 도시로 받아들여야 할지 잠재적 범죄를 위협적으로라도 눌러야 하는 위험한 도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공원 곳곳에 삼삼오오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간혹 숙면을 취하는 분도 있음.
빈트후크의 관광 안내소, 무장 군인, 정갈해 보이는 도심의 모습이다.


터미널을 완전히 벗어났다. 띄엄띄엄 나지막이 앉은 건물들은 아침 햇살을 받아 노랗게 물들다. 인적이 드물고 한적한 곳이라 한결 기분이 느긋했다. 살갗이 따가워지는 걸로 봐서 아침 햇살의 부드러움도 막바지로 가나보다.

지도와 거리 표지판 번갈아 보 길 는데, 아프리카 여건상 아날로찾기 외엔 방법이 없었다. 내비게이션은 아직 일렀다. 레트로 낭만을 즐기고 싶었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배낭 무게가 예사롭지 않았다. 어깨가 뻐근무렵 지도 위 게스트 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얘들아, 배고프지 않니? 공복이 너무 길어."

"나도 어지러워. 마트 가서 빨리 뭐 좀 사 오자."

"김이랑 라면은 내가 한국에서 챙겨왔지, 쌀만 있으면 될 거야"

그러고 보니 24시간 동안 제대로 된 끼니가 없었다. 서둘러 장을 보고 아프리카 쌀로 아점을 지었다. 우리나라 쌀은 쫀득한 찰기가 있고 반지르르한 윤기가 흐르지만, 아프리카 쌀은 훅 불면 후루룩 날아가는 푸석하고 길쭉한 품종이었다. 어지간한 허기 아니고서는 입맛에 맞지 않았겠지만, 까탈을 부릴 허기가 아니었다. 김과 양배추로 쌈밥을 만들어 게 눈 감추듯 배를 채우고 라면까지 곁들였더니 아쉬울 게 없는 푸짐한 한 끼가 되었다. 다소 개밥스러운 비주얼은 문제 될 바가 아니었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부엌에서 요리를 했더니 개밥이 만들어졌다.






대책 없이 내던진 사표 후에 찾아든 무방비 상태의 자유로움을 아프리카에서 누리고 있지만, 적어도 로드맵 하나쯤은 세워놔야 팔방으로 흩날려도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아직은 인생의 로드맵을 차분히 생각할 만큼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지만, 최소한 앞으로 한 달치의 로드맵은 필요했다. 배부른 시간을 이용해 앞으로의 아프리카 일정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모습이 그랬듯, 언제 어디서 어떤 우연과 인연과 사건들을 만나 애초의 계획을 수정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마치 내가 회사의 합격소식을 듣고 엉덩이를 흔들며 신나했던 순간에, 퇴사의 순간을 절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수정구슬로 미래를 내다볼 수 없을 바엔 자세한 계획을 세우는데 시간을 쏟지 않기로 했다.


먼저 최앤장 부부는 아프리카 봉사활동에서 만났다는 안과 민이라는 친구들을 요하네스버그에서 불러 합류시키기로 했다. 내일 렌터카를 받고, 캠핑 장비를 대여한 후, 안과 민을 공항에서 픽업한 후, 에토샤 Ethosha 국립공원을 둘러보며 캠핑을 하면 얼추 열흘짜리 일정은 완성되는 것 같았다. 약 2,500 킬로미터 정도의 이동 거리였는데 장 씨와 번갈아 운전하면 큰 부담은 없을 것 같았다. 이후에는 홀로 잠비아, 탄자니아를 거쳐 케냐까지 올라가는 루트를 짰다. 그런데 이즈음에서 무면허 최 씨가 의기양양하게 미리 예약해 놓았다는 렌터카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나와 장 씨는 1종 보통 면허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면허인 최 씨가 간과한 것은 모든 1종 보통 운전자가 수동 변속기를 능숙하게 다룬다는 뜻은 아니라는 거였다.

"오토는 가격이 두배다."

설득력 있는 말로 논쟁을 종결시켰지만 수동변속기 차를 둘 다 한 번도 몰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이틑날 아침 장 씨와 렌터카 사무실로 향했다. 짐 없이 걸어가는 40분 거리는 이제 가뿐하게 다녀올 수 있는 정도로 변해 있었다. 지하철역과 회사를 오가던 거리도 버겁던 때를 생각하면 크나큰 발전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강아지풀이 잔뜩 피어난 비포장 흙길을 따라 반듯반듯 깨끔하게 지어진 마을을 지나왔다. 큰길로만 나가지 않으면 차량 통행도 비교적 없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해 서류를 작성하고 차를 받았다. 2010년형 1.6L 4기통 5인승 니싼 리비나, 암팡진 모양의 MPV 다목적 자동차였다. 막 세차를 끝냈는지 안팎이 번쩍거렸다. 일단 한국에서 계속 운전을 해왔던 내가 먼저 운전석에 앉았다. 그렇다 한들 오른쪽 운전석에 앉는 게 익숙할 리 없었다. 왼손을 변속기 위에 올려놓는 자세가 어정쩡하기 짝이 없었다.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던 찰나.


"와아아아아앙!!"


자기 엔진이 굉음을 지르며 계기판 RPM 바늘이 6천을 뚫고 치솟았다. 클러치를 너무 세게 밟고 있어서였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왼발이 저렸다. 식겁을 하고 다시 액셀을 지그시 누르면서 클러치에서 발을 뗀다. 푸더더덕, 이번엔 자동차가 몸서리를 치며 엔진이 꺼졌다. 스무 걸음이면 주차장 입구를 나갈 수 있는데 꼼짝을 못 하고 있다. 굉음에 당황한 직원이 사무실 밖으로 뛰어나와 수동변속기를 쓸 줄 아냐고 물었다.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라며 손사래를 쳤다. 차분하게 13년 전 면허시험장에서의 기억을 복기했다. 클러치와 동시에 브레이크, 1단 변속, 엑셀 살살 누르기, 클러치 살살 떼기, 그리고 출발. 좋아, 덜덜덜덜 앓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푸더더덕. 수렁에 빠져들었다.


겨우 도로에 들어섰지만, 비상등을 켜고 잔뜩 화가 난 뒤차들을 황망히 보냈다. 식은땀이 흘렀다. 아까 걸어서 지나왔던 마을을 뱅글뱅글 돌며 차에 익숙해지도록 연습했다.


'앗, 이 느낌인가!?'

시동이 꺼지기 직전 달달거리는 엔진의 미묘한 진동을 잡아냈다. 이 진동 후에는 항상 엔진이 진 것이다. 이때 클러치 깊이를 유지한 채 엑셀로 엔진 회전수를 높여야 한다! 후로 엔진이 꺼지는 횟수 현저히 줄었다.


호스텔에서 40분 걸어 간 거리를 차로 2시간 운전해 온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경찰에 신고할 뻔했어!"

돌아왔어야 할 시간을 훌쩍 넘긴 탓에 발을 동동 구르던 최 씨는 붉으락푸르락 변해 있었다. 렌터카 회사에서는 전화로 떠난 지가 한 시간도 더 됐다는 말을 들었고, 도대체 오않아 강도라도 당한 줄 알고 심장이 울렁거려 경찰서 위치를 확인하려던 찰나였다고 했다.


"어휴, 말도 마라. 우리가 말이지…."

굽이굽이  언덕배기 교차로를 수동 차로 넘어온 무용담을 주절주절 늘어다.


조그만 차에 배낭 여러 개. 아이스박스, 카메라 가방 등 온갖 짐들을 실었다. 잊을만하면 역주행으로 좌측 통행 시스템인 걸 깨달으며 캠핑 장비를 빌리는 곳에 도착했을 때,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엔진은 이미 꺼진 상태였다. 굳게 닫힌 철문은 인터폰으로 우리가 왔음을 알리고 나서야 스르륵 열렸다.


일꾼들은 군용 막사에서 쓸 법한 두꺼운 재질의 천과 잔뜩 녹이 슨 철 프레임, 7~8인용 밥솥 크기의 취사용 가스통, 접이식 의자, 바비큐용 녹슨 철망, 각종 조리도구를 테트리스 하듯 차곡차곡 실어주었다. 차가 좁아터질 지경이었지만 용케 빈 곳을 찾아 차곡차곡 빈틈을 메꿔나갔다. 비용을 지급하고 요하네스버그에서 날아온 민과 안을 픽업하러 공항으로 갔다. 그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수더분하고 붙임성 있는 성격들이라 평소와는 달리 적응 기간이 오래 필요하진 않았다. 타지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끼리 발휘하는 특유의 동질감과 유대감도 한몫했다. 다섯 명으로 가득 채워진 조그만 차는 왁자지껄 시끄럽게 도시를 벗어났다.


낮은 언덕 위로 곧게 뻗은 길은 하늘로 연결됐다. 이렇게 달리면 그대로 하늘 위로 솟아 올라갈 것만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보던 그 하늘과 같은 하늘인지 의심스다. 잊고 있었지만, 하늘은 언제나 이렇게나 푸르고 넓은 것을.

영화 '13층'을 보면 컴퓨터가 조작한 세상이라는 걸 깨달은 주인공이 길의 끝을 넘어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 생생하던 풍경은 얼기설기 얽힌 그래픽 선으로 바뀌어 버리는 장면이 있다. 이 길을 따라 계속 달리면 그동안 내가 알던 세상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섯 시간을 예상했지만 한 시간을 더 달리고도 목적지인 캠핑 사이트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종이 지도 위 손가락을 따라 길을 찾아야만 했다. 포장도로가 갑자기 비포장으로 변하는 구간이 나왔다. 다시 한번 지도와 도로 표지판의 이름을 비교해 봤지만 틀림없었다. 완전 또 다른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무리 아프리카라지만 이런 데서 말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맞았다면 에러가 났을 거로 생각했을 법했다. 멀리서는 구름이 땅으로 흘러내렸다. 그것은 비구름이 다가오는 모습이다.


토이 스토리에 나오는 구름은 진짜였다.
구름이 흘러 내리는 것처럼 멀리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단 막대기는 내려와 있는 캠핑 사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8시까지만 열어둔다고 했으니 억울한 건 없지만, 다음을 어떡해야 하나 싶어 나기가 찼다. 황망한 마음에 입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때 어디선가 관리인이 나타났다.


자동차 라이트로 불을 밝히고 배정받은 사이트에 주섬주섬 짐들을 내려놓았다. 두꺼운 천 조각 사이로 녹슨 철 프레임을 집어넣었더니 제법 텐트다운 모양새가 갖춰졌다. 밤하늘에는 남십자성이 빛나고 있었다. 계속.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다는 남십자성이 텐트 위에 있다.
테트리스의 달인들
비포장 도로가 나타났고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야했다.
형이 거기서 왜 나와.
다섯시간을 달리고 한시간을 더 달려도 캠핑 사이트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스치듯 지나간 어느 캠핑사이트의 모습이다.
비가 온 후 쌍무지개가 하늘에 나타났다.


* 갇힌 곳을 떠나 싶은 자유로움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zoo is noT enOUGH (동물원으로는 부족해)의 대문자를 따와 '어느 직장인의 터프(tough)한 아프리카 여행기'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동경했고, 사진에 미쳤고, 아프리카를 꿈꿨던 그때로 돌아갑니다. 내용은 모두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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