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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애틱 Aug 26. 2021

흔해빠진 물개와 퇴사자들

포토에세이 zoo is noT enOUGH #8 케이프 크로스



케이프 크로스로 가는 황량한 벌판을 지나 나타난 휑한 공터에는 물개서식지 매표소가 덜렁 세워져 있었다. 삐그덕 거릴 것 같고 위태로워 보였다. 인적도 없는 데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최소 물개 모양 간판 정도는 달아줄 법한데 흔한 기념품 가게도 없었다. 유명한 물개 서식지라는 게 무색할 만큼 별 볼일 없는 꼴이었다. 매표소 내 하릴없이 앉아있는 직원 양반은 하루에 열 마디는 할까 싶었다.

 

'물개 두어 마리나 겨우 보는 거 아냐?'

실망감이 슬슬 고개를 들었다. 비포장 도로에서 궁둥이를 들썩이며 운전해 온 시간이 얼만데. 심지어 다음 목적지 스피치코프로 가는 길을 거슬러 내려오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는데. '남아공에서 고깃값 내라던 아저씨한테 까짓 거 몇 푼 주고 물개 사진이나 더 찍을 걸 그랬나...'


일단 실망은 나중에 하더라도 여기까지 왔으니 가보기라도 하자고 입을 모았다. 그렇게 입장을 정리한 가격을 입장료로 냈다(응?). 화살표를 따라 차를 움직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묘하게 계속 따라 다니는 냄새가 있었다. 돼지 가축장에서 나는 분뇨 냄새재래식 화장실에서 코를 찌르는 암모니아 냄새 같기도 했다. 얼핏 수산시장의 비릿한 물고기 냄새가 섞인 것도 같았다. 머리 위에 계속 떠다니던 물음표는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하며 단번에 느낌표로 바꼈다. 


수만 마리의 물개가 동시다발적으로 싼 똥과 오줌이 바다 냄새와 뒤범벅되어 콧구멍의 후각 세포를 풀파워로 후려치는 거대한 물개 군락의 강려크한 존재감이었던 것이다. 모래 사변과 돌바위들이 온통 물개들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한눈에 이렇게 많은 물개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물개 울음소리는 어지럽시끄러웠다.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꺼엉꺼엉'은 말할 것도 없고 이토록 다양한 울음소리를 내는지 몰랐다. '음메헤헤 '하는 염소 소리, '꾸엑꾸엑' 하는 오리 소리, '어어어엉' 하는 소 울음소리도 들렸다. 차이라면 복식호흡으로 지르는 소리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느낌이랄까. 울음소리만 듣자면 동물 농장이 따로 없었다. 물개 서식지에서 느껴지는 스케일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허름한 매표소는 꽉 찬 자신감의 이면이었나 보다. '방망이 깎던 노인'이 떠올랐다. 네가 어찌 생각하거나 말거나 제대로 맛을 보여주겠다고 호통치는 것 같아 깨갱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물개를 원 없이 보는 장면이다.


서식지 주변에는 난간이 둘러진 길이 나 있어 가까이 관찰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 펭귄에 이어 이것들에게도 사람은 지나가는 개 이상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후각은 마비가 됐는지 냄새가 더는 거슬리지 않았다. 단지 공기 중에는 여전히 비린내가 떠다니는 정도만 느낄 수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물개를 보니 기가 막혔다. 남아공에서 물개는 매우 특별한 존재였는데 이제 흔해빠진 조약돌만 못한 느낌에 맥이 빠졌다. 혹시 내 꼴이 지금 이렇지 않은가 싶다.




퇴사는 인생을 흔들어놓은 사건이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 감행한 게 뿌듯했다.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사표를 입에만 달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 허세도 부리고 싶었다.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남들 눈에 특별한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퇴사를 준비하고, 퇴사를 했고, 퇴사 후를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회사 밖은 물개 마리 수만큼이나 퇴사자들이 천지였다. 각자의 기구한 사연들이 조약돌처럼 널려있었다.


퇴사를 준비하는 과정은 마치 무대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간부들이 아쉬워했고, 모두가 친절해졌고, 안부를 묻는 동료들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갑자기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치를 재확인받는 것도 같아 묘한 승리감에 취했다.


예수 그리스도 도마뱀이라고 있다. 물 위를 세상 방정맞게 뛰어가는 도마뱀이라면 금방 이미지가 떠오를 것 같다. 이놈은 일초에 스무 걸음이나 재바르게 움직이면서 수면을 박차기 때문에 물 위를 달릴 수 있다고 했다. 대신 걸음을 멈추면 그 길로 물에 빠지고 만다. 내가 회사에서 딱 이놈이었던 것 같다. 행여라도 멈추면 물에 퐁당 빠질까 두려워서 미친 듯이 달렸으니까 말이다. 백조는 우아하기라도 하지, 나는 요령 없이 팔다리를 사방으로 흔들어 재끼며 법석을 떨었던 것 같다. 퇴사와 동시에 발걸음을 딱 멈추면 되는데, 모양 빠지게 관성이 붙어서 멈추는 것도 쉽지 않았다. 퇴사를 말하고 회고한다는 건 붙어버린 관성이 멈추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그러나 관성이 적용되지 않는 현실은 달랐다. 무대의 불이 꺼지면서 모두가 사라졌다. 더 이상 주목하는 사람도, 붙잡는 사람도, 관심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곧장 빈 책상은 채워지고 그들의 일상은 다시 바쁘게 돌아갔다. 지천에 널린 물개처럼 흔해빠진 퇴사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퇴사는 나에게 특별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라는 걸 빨리 깨달아야 했다. 공중에 뜬 발을 현실에 내려놔야 일어설 수 있다.


이제 혼자라는 걸 상기시켜 주듯,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계속.


 




물개 서식지 매표소/사무소의 유일한 장식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달려있다. 저 길을 따라가야 한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사색에 빠진 녀석이 보인다.
와중에 태어난 자그만 아기 물개가 엄마 옆에 딱 붙어 있다.



* 갇힌 곳을 떠나고 싶은 자유로움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zoo is noT enOUGH (동물원으로는 부족해)의 대문자를 따와 터프(tough)한 아프리카 시리즈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을 동경했고, 사진에 미쳤고, 아프리카를 꿈꿨던 그때로 돌아갑니다. 내용은 모두 직접 촬영한 사진으로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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