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여행 꿍꿍이

전라남도_여수

by 서작가

일단 비행기 티켓을 살 거야

가장 먼 곳으로 가는, 하지만 가장 편한 자리로 살 거야.

짐은 최대한 들지 않고 가겠어.

도착한 곳의 첫날밤은 무조건 좋은 호텔에서 잘 거야.

라운지 바에서 좋은 와인을 마시며 이렇게 말해야지.


드디어 혼자다!


남편이 미운 날에는 혼자 방에 조용히 앉아 이런 상상을 한다. 남편이 미운 이유는 백가지를 대라고 해도 댈 수 있다. 또는 이유를 댈 수 없지만 그냥 미울 때마저 있다. 그가 내 남편이라서 밉다고 해야 하나.

소리 지르고 싸울 여력은 이제 없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미워하며 앙금을 쌓다가 나만의 팥빵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간 터득한 평화의 비법이라고 할까. 팥빵이 나에겐 그런 상상이다. 멀고 먼 어느 곳에서 와인을 마시며 드디어 혼자다, 를 말할 그 날을 꿈꾸는 것. 물론 그 앙금의 제공자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연휴에 여수 여행을 가자고 남편이 말했다. 그게 전부였다. 불과 며칠 전에 결정해버린 탓에 이틀 치 숙소를 예약하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두 번째 날만 숙소를 예약하고 첫날은 잘 곳도 정하지 못한 채 갈 수밖에 없었다.


"설마 우리 세 식구 잘 곳이 없겠어?"

속 편한 소리. 이 연휴에 우리만 여수에 가겠어?


"정 없으면 찜질방에라도 가서 자면 되지."

아니, 난 싫은데? 여수까지 가서 찜질방에서 자고 싶지 않다고.


연휴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모두 여수에 몰린 것처럼 여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시내는 퇴근시간 올림픽 도로를 방불케 할 만큼 막혔으며 식당은 어디를 가도 기본 1시간 이상 줄을 서야 했다. TV에라도 나온 맛집이라면 건물을 빙빙 돌만큼 줄이 길었다. 여수에서 꼭 먹어야 한다는 게장이나 회에 대한 기대는 길고 긴 줄에 지쳐 에라 모르겠다 배 고픈데 그냥 햄버거나 먹고 말까 끼니때마다 갈등하게 했다. (그러다가 실제로 버거킹에 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이 미웠다. 이 연휴에 여수까지 가자고 한 것도 밉고, 배고픈데 제 때 밥을 못 먹는 것도 다 남편 탓인 것처럼 미웠다. 1시간 넘게 기다려 놓고 맛이 없다고 불평 비슷한 거라도 하면 그 미움이 더 커졌다. 날이 더워서 미웠고, 길이 복잡해서 미웠다. 다 남편 탓인 것처럼.


미움은 첫날 숙소에서 절정에 달했다. 첫날 숙소를 구하지 못한 탓에 저녁 무렵부터 지나치는 호텔, 호스텔, 펜션 등을 가봤지만 정말 방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한집 건너 호스텔 간판이 보일 정도로 숙소가 많았는데 어쩜 이렇게 단 하나의 방이 없을까. 절대 싫다고 했지만 이러다가는 정말 찜질방에라도 가게 될 것 같았다.


"저기 가볼까?"


몇 번이나 지나치면서 아무리 방이 없어도 우리 저기서는 자지 말자고 했던 모텔이었다. 과연 운영이나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낡은 건물에 간판에는 불도 켜져 있지 않았다. 저기 들어가면 어쩐지 무슨 사건에 휘말릴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거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 식구 누일 작은 방이라도 있다면 저기가 어디라도 좋을 것 같았다.


"마지막 방을 잡았어!"


남편이 신이 나서 우리를 불렀다. 남편과 거의 동시에 들어갔던 다른 사람은 안타깝게 우리에게 방을 놓치고 다시 나가는 길이었다. 여기에도 방이 없으면 진짜 여수에는 방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다 가봤어요. 나가는 그의 뒤통수에 오지랖 넓게 한마디 해주려다 말았다. 지금 남 생각해줄 처지가 아니었다

모텔 주인은 우리에게 열쇠를 주면서 아이를 흘낏 보더니 이불도 한 장 더 주었다. 이런 이불은 내 어릴 적 사진 속에서나 보던 디자인인데 아직도 이런 이불이 있다니. 하지만 놀랄 일은 이불만이 아니었다.


"엄마, TV가 왜 이래?


이런 방은 나도 드라마에서나 봤다. 딸이 의아하게 봤던 TV는 무려 브라운관 TV. 녹색의 커튼과 방에 비해 큰 침대는 또 어떻고. 노란색 장판은 이 방의 모든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깔끔했지만 왠지 편히 누워지지 않을 것 같은 이 방. 모텔이 아니라 여관이라면 더 어울릴까. 방이 왜 남아 있었는지 알고도 남겠다.


이 순간 역시 모든 미움은 남편에게 향한다. 내가 그렇게 미워하는 줄도 모르고 남편은 흡족해하고 있다. 우리 세 식구 누일 방 하나를 찾아낸 당당한 가장의 얼굴이다. 적어도 찜질방은 아니잖아. 이 정도면 된 거지 안 그래?


누구도 우리의 여행을 망칠 자격은 없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마음속으로만 앙금을 만든다.

오늘도 쌓여가는 나의 단팥빵.




내가 원하는 건 바다가 보이는 근사한 방이라거나, 풀코스로 예약된 식당이 아니었다. 이왕 떠나온 여행이니 약간의 기대와 설렘을 주기를 바랐던 것뿐이다. 말하지 않아도 손발이 척척 맞는 짝꿍과의 여행은 설렘이 없어서 미움이 생겨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도 여행에 낭만을 바라는 철부지 애송이일까.

그래서 그때 엄마는 아빠랑 단둘이 여행 가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나. 혼자 갈지언정 둘이는 안 가겠다고 너무 단호하게 말해서 나는 진지한 농담인 줄 알고 막 웃었다. 안타깝지만 사랑도 무엇도 시간이 흐르면 익숙함과 함께 미움이 온다. 누구나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드디어, 혼자다!


이렇게 외칠 그날을 위해 지금 내가 너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걸로 퉁치자면 어느 정도 되지 않을까. 물론 이유도 없이 미움받으며 나의 계획은 꿈에도 모를 남편 쪽이 조금 불리하긴 하지만 그 불리함을 플러스시킬 이유는 백가지도 더 댈 수 있다.


아침 일찍인데도 주차장을 가득 메웠던 차들은 어느새 다 빠져나갔다. 안개가 걷히니 모텔 건너편으로 바다가 조금 보이기는 했다. 어쩌면 설렘을 줄 수도 있었을까. 오늘은 얼마나 줄을 서야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피어오르는 미운 감정을 눌러본다. 오늘은 조금만 미워해야지.


아직 여행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여행의 낭만을 꿈꾸는 나는 아직 애송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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