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_탈린
떠나면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제의 반복 같은 오늘의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서 낯선 것을 느껴보고 싶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내가 떠나기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엄마, 엄마를 입에 달고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트러블 메이커. 세상 어느 트렁크보다 크고 무겁고 귀찮고 그러나 절대 버릴 수도 없는 나의 짐덩어리. 아이와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일상의 연장이라 것을, 어쩌면 일상을 넘어선 고행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무도 내게 그런 건 말해주지 않았다.
여행을 왔다면 일상의 나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나의 작은 동행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고프면 당장 지금 먹어야 했다. 하지만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은 입에 대지 않으려 해서 나를 늘 초조하게 만들었다. 화장실이야 말할 것도 없이 당장 해결해야 할 큰 사건이었다. 많이 먹지도 않으면서 화장실은 어찌나 자주 가는지 관광지보다 화장실 위치를 먼저 찾는 건 습관이 되었다. 길을 걷다가도 졸리면 안고 업어서 수면시간을 보장해줘야 했다. 그 멋지다는 어떤 거리를 누가 말하면 나는 아이를 업고 땀을 흘린 거리로 기억하곤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내가 챙겨야 할 것은 원피스와 하이힐이 아닌 유모차였음을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에스토니아 탈린에 도착해 숙소를 구글 지도에 찍어보니 '도보 10분'이라고 나왔다. 하지만 30분을 걸어도 숙소는 나오지 않고 구글은 계속 10분이면 간다고 우리를 고문했다.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에 트렁크 바퀴가 빠져버릴 듯이 덜컹거리며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구글 지도를 보며 왔던 길을 반복해 걷는 나에게 아이가 말했다.
많이 힘들지? 미안해. 금방 숙소에 도착할 거야. 도착해서 우리 따뜻한 물에 목욕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푹 쉬자. 엄마도 여기는 처음이라서 길을 좀 헤매고 있는데 이제 금방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조금만 더 참아줘.
분명 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긴 말을 할 여력이 내게도 없었다.
입이 샐쭉해진 아이는 내 손 대신 트렁크 손잡이를 잡고 터덜터덜 따라온다.
미안. 나도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나도 지금 당황스럽고 힘들거든. 생각 같아서는 다시 공항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야. 도보 10분이라는 구글마저 나를 놀리는 것 같고 저기 그냥 지나가는 소녀들의 웃음도 마치 길도 모르는 아줌마라며 비웃는 것 같아. 내가 어쩌자고 너까지 여기에 달고 와서 이 고생을 하는 걸까. 미안한데 한편으로는 너라도 내 편으로 그냥 잠자코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야. 그래 내가 못났어. 엄마라고 다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란 말이야.
덜컹거리는 트렁크 소리 속에 섞인 아이의 발자국 소리를 확인하며 걸어간다.
아이가 애써 트렁크를 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무겁고 크고 귀찮지만 절대 버릴 수 없는 나의 짐덩어리.
배고프다며 이것저것 시켜 놓고는 입에 맞지 않는지 더 이상 먹지 않는다. 영 못 먹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은 남기고 가는 음식이 아까워 화가 난다. 이럴 거면 다 먹을 수 있다고 큰소리나 치지 말지.
결국 아이는 울면서 한 숟갈 먹는 척 하지만 이제는 배가 아파 못 먹겠다고 한다. 정말 엄마가 혼자 비행기에 태워 먼저 보내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오고 싶어 온 여행도 아닌데 맛도 없는 음식을 먹으며 날마다 엄마의 협박을 견뎌야 하는 아이의 여행. 협박과 눈물, 후회와 눈물, 분노와 연민이 매 순간 교차하는 엄마의 여행. 그랬던 우리의 여행.
여행을 떠나기 전 내가 챙겨할 것은 현지 맛집 리스트가 아닌 햇반과 김이었음을 그때 또 깨닫는다.
결국 맥도널드 해피밀로 타협을 보고 맥도널드에 앉아 탈린 비루 게이트를 내다본다. 올드타운 안에 있는 맥도널드라니. 아이는 치즈버거도 먹는 둥 마는 둥. 네가 굳이 맥도널드를 고른 이유가 치즈버거가 먹고 싶어서라기 보다 해피밀 세트에 딸려 오는 장난감 때문이라는 걸 내가 모를 것 같니? 하지만 오늘은 넘어간다. 어쨌든 뭐라도 먹었고, 장난감 때문에 조금 전 울었던 이유를 잊은 것 같으니까.
그렇게 대충 보지 말고 잘 보라니까. 너 지금 탈린의 비루 게이트 본 거야.
잠든 아이를 두고 벗어 놓은 양말과 속옷을 대충 비벼 빨아 침대 난간에 널어놓는다.
내일까지는 말라야 할 텐데.
그나저나 내일은 어디를 가지?
뭘 먹지?
어제와 다른 일상을 꿈꾸며 떠난 낯선 곳으로 여행이었다.
여행의 설렘 중 팔 할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낯선 것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오늘 저녁은 뭘 해 먹지 하는 주부의 지긋지긋한 고민처럼 여행도 결국 일상의 연장이 되었다. 먹고사니즘의 굴레는 계속되고 아이에게 감정의 오르내림을 참지 못한 나를 자책하는 것은 떠나기 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익숙한 냄새가 나는 내 이불과 베개, 내 앉은자리가 오래 남는 낡은 소파, 이가 나가도 버리지 못하는 그릇이 있는 어수선한 부엌, 짝이 맞지 않는 장난감들이 널브러진 아이의 방. 책상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겠지.
오늘은 그렇게 나오고 싶던 일상이 그리운 밤.
사람이란 참 이상하지. 항상 두고 온 것이 아쉬워.
언젠가 이 밤도 아쉬워 그리울까.
그나저나 내일은 아이가 뭘 좀 먹어야 할 텐데.
일상의 근심이 번지는 낯선 곳에서 하루가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