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 하는 여러 가지 짓는 일
작가라면 작업실에 대한 로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공간이 넓을 필요는 없지만 책상은 좀 좋은 걸 두어야 한다. 다리가 흔들리는 가벼운 조립식이 아닌 묵직한 원목이면 좋고 심플한 디자인이어야 한다. 책상만큼 중요한 건 물론 의자이다. 적당히 내 몸을 받쳐주어야 하지만 너무 푹신하면 글쓰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니 적당한 긴장감을 주는 편안한 의자를 갖추어야 한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이 있으면 좋지만 남향이나 동향보다는 서향의 방이 좋다. 하루 종일 해가 들어오는 남향이나 아침에 잠깐 해가 비치는 동향보다는 저녁 무렵 해가 들어오는 서향의 창이 글쓰기 감성을 채우는데 더 적당하다고 생각된다. 벽면에는 내가 원하는 책을 언제나 꺼내볼 수 있는 책장이 둘러져 있다. 그리고 작지만 좋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하나쯤 두면 음악을 들을 때 유용하다. 글과 음악은 빼놓을 수 없는 감성의 짝꿍이니까.
생각만 해도 글이 막 써질 것 같은 이 작업실은 사실 내 로망일 뿐 현실은 아주 다르다. 굳이 작업실이라고 이름 붙여야 한다면 내 작업실은 우리 집 부엌이기 때문이다. 빵 부스러기나 주스 자국, 혹은 밥풀떼기 같이 아침에 식구들이 먹고 나간 흔적이 채 지워지지 않은 식탁에서 나는 컴퓨터를 열고 책더미를 쌓아둔 채 글을 쓰는 일이 다반사이다. 가지런한 책장 대신 미처 다하지 못한 설거지 더미를 애써 무시하며 써야 할 글들을 '처리'하곤 한다.
부엌은 그래서 밥도 짓고 글도 짓는 내 진짜 작업실인 셈이다.
첫 책을 내고 얼마 안 있어 어디선가 평소에 작업은 어디서 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마 물은 이는 응당 작가라면 번듯하지는 않아도 작정하고 쓰는 작업실 정도는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나 보다. 질문을 받은 나도 사실 당황해서 더듬거리며 '집에서 주로 한다'고 했는데 딴에는 조금 유머를 섞겠다고 밥상에서 주로 한다고 했는데 그는 예의상 웃었고 그 질문은 인터뷰에서 편집을 했다. 밥상에서 작업하는 작가라는 게 그에겐 크게 와 닿지 않았나 보다. 심지어 웃기지도 않았고.
결혼 후 신혼집을 꾸밀 때 나는 호기롭게 서재를 꾸몄다. 창을 바라보게 책상을 배치하고 벽면으로 책장을 둘러 책을 꽂아 정말 '서재'같아 보였고 마음만 먹으면 나는 그 책상에 앉아서 얼마든지 글을 쓸 수 있는 그런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공간은 얼마 안 있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남향의 창은 해가 하루 종일 들어 오래 앉아 있기 힘들었고(커튼을 쳐 놓으면 답답하고) 큰 맘먹고 비싸게 주고 산 의자는 사장님 의자처럼 너무 푹신해서 앉기만 하면 잠이 왔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곧 태어난 아기 덕분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지면서 그 방은 점점 아기 물건에 밀려난 어른들의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가 되고 말았다.
이사를 하면서 책상을 거실에 두는 방법으로 오픈형 작업실을 만들어 보았다. 작은 모니터의 노트북 대신 큰 화면의 데스크톱을 사서 올려 두고 이제 미간 찌푸리지 말고 큰 화면으로 작업하리라, 호기롭게 할부로 그었다. 하지만 어째 내 글쓰기 작업용이라기보다는 아이의 영어 숙제나, 남편의 게임용으로 더 자주 쓰이는 느낌이다. 급하게 써야 할 게 있는데 아이가 만약 숙제한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라도 하면 비키라는 말은 차마 못 하고 낡은 내 노트북을 주섬주섬 꺼내고야 만다. 물론 그때 내 자리는 식탁이다.
여전히 부엌은 내 작업실이다.
옆집 아이 엄마가 엘리베이터 잡고 소리치는 거 보니 옆집 아이는 오늘도 유치원 버스 시간에 늦는 모양이구나. 아랫집 할머니는 아침부터 고기를 구우시네. 무슨 날인가? 열어 놓은 창문으로 길 건너 아이의 학교에서는 종이 치고 운동장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참 오늘 개학했지?
내 '작업실'에 앉으면 온갖 생활의 소리가 들려온다. 써야 할 글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생활의 일들이 많아 글 짓는 감성은 점점이 흩어지지만 글이란 게 감성으로만 쓰는 게 아니란 걸 쓰는 사람들은 안다. 쓸 게 있다면 쓰는 곳이 어디라도 써지게 마련이다.
나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복잡한 이 곳에서 오늘도 나는 짓는다. 글도 밥도 그리고 나의 생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