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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작가 Jun 08. 2018

공짜 맥주라면 영혼이라도 팔겠어

네덜란드_암스테르담

호스텔 복도가 갑자기 시끄러웠다. 

단체 손님이라도 온 걸까, 곧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하고 누웠지만 소음은 줄어들지 않았다. 웃음소리, 뭐라 하는지는 모르지만 재잘대는 말소리에서 흥분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뭐지? 갑자기 파티라도 열린 거야? 침대에서 나와 방문을 살짝 열고 복도를 내다보니 아이들이 가득했다.  

말 그대로 '아이들', 고등학생 어쩌면 중학생쯤 될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복도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수학여행 같은 걸 온 게 분명한 이 아이들은 지금 막 체크인을 해놓고 짐 정리나 샤워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어쩐 일인지 복도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안녕! "

"아, 안녕! 지금 무슨 일 있니?"


방문을 빼꼼 열고 쳐다보던 나에게 여자애가 인사를 했다.  스모키 화장을 짙게 한 소녀는 잠옷 차림의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설마 벌써 자는 거야? 하는 표정. 얘야, 지금 잘 시간 맞아.


"지하에 있는 바에서 파티를 한대. 아직 시간이 남아서 기다리는 중이야."


복도를 가득 메운 이 흥분은 그 때문이었구나. 좋을 때다. 그럼 이 언니는 이만...


"너는 왜 안 가? 맥주 1병 공짜래. 금요일에만 하는 파티야!"


매주 금요일에 호스텔에서 하는 바에서 파티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오늘이 금요일인지는 몰랐다. 호스텔 투숙객에겐 혜택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게 공짜 맥주인 줄은 몰랐다. 지금에 와서는 그깟 맥주 1병쯤, 하겠지만 그땐 그걸 놓치면 크게 손해 보는 것 같았다. 3만 원짜리 방에서 자는데 맥주 1병이면 그게 얼마야. 

어느새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었다. 그렇게 나가려다 거울을 보니 민낯이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 하나같이 눈가를 검게 칠한 스모키 소녀들 사이에서 이러고 나가면 누런 종이인형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화장을 한들 뭐가 달라질까,  세상 어디 가든 화장 제일 잘 하는 사람은 그 나라 10대들이라는 건 진리인데. 차라리 그냥 종이인형이 되는 걸 택하겠다. 게다가 내 목적은 공짜 맥주 1병인걸. 즉석만남 이런 거 있을 리가 없잖아.


호스텔 파티라는 게 그렇듯, 오랜 여행으로 후줄근해진 여행자들이 모여 여행담이나 나누며 마시고 노는 그런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조용히 맥주나 마시고 와야지. 아까 말 걸었던 여자애를 만나면 고맙다고 말이나 걸어볼까? 스모키 화장 잘했다, 예쁘다를 어떻게 말해야 영어 잘 하는 것처럼 보일까를 생각하면서 지하로 내려갔다. 


바에서 한다고 하지 않았나? 'Bar' 가는 길이라고 붙여놓은 화살표를 따라왔는데 그곳은 클럽이었다. 테이블은 벽을 따라 붙여 놓아 홀 중앙은 춤추는 아이들로 벌써 가득했고, 홀 중앙에 집중된 조명은 나름 깜빡이며 분위기를 냈다. 게다가 이 뿌연 것은 일부러 뿌려놓은 연기 효과인가, 환기되지 못한 먼지 인가.  기대에 찬 아이들의 표정은 나처럼 공짜 맥주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복도를 서성이며 만들어대던 흥분의 방울방울이 여기서 터지고 있었다.  

한껏 멋을 부린 여자 아이들과 몸은 어른처럼 크지만 어쩐지 어설픈 남자아이들은 웃고, 마시고, 춤을 췄다. 학교에서 온 수학여행이라면 문화충격이라 할 만했고, 그게 아니라면 저 아이들은 대체 뭐하는 애들일까 궁금할 정도로 자유로웠다.  


"여행 중이야? 어디에서 왔어?"


그래, 이런 걸 묻고 답해야 호스텔 파티지. 이런 질문에는 언제든 대답할 수 있다. 이후로 이어지는 언제부터 여행을 하고 있는지, 어느 나라를 지나왔는지, 어디가 좋았는지 같은 '여행자의 대화'가 이어질 게 뻔하다. 다음 대화 페이지로 넘어갈 마음의 준비를 했다.


"왜 춤을 추지 않아?"


응? 이건 '여행자의 대화'에 없는 예문인데?  왜 춤을 추지 않냐면 말이지,  because를 말하는데 그 애는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아니 저기,  내가 지금 여기서 춤을 추기는 좀...


앉아 있을 때는 그나마 있는 핀 조명이 너무 희미하다고 생각했다. 사이키 정도는 있어야지. 음악 소리도 너무 작아, 스피커도 좀 키우고 엉성해도 DJ가 있다면 더 분위기가 살 텐데. 공짜 맥주나 마시러 온 주제에 이런 생각을 했는데 막상 나와 보니 조명은 너무 밝고, 음악 소리는 너무 컸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걸까. 공짜 맥주의 대가가 너무 크구나.


내 손을 잡아 끈 아이는 키는 나보다 조금 더 크고, 뒷 머리를 기르고 어울리지 않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는데 이미 취한 것 같았다. 춤을 추는 걸 보아하니 실력보다 흥이 앞 선 모양이다. 그 정도라면 나도 맞춰주마. 춤이라는 걸 언제 췄는지 모르지만 그냥 들어가 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게다가 여긴 서울도 아니고, 나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나는 뭘 해도 되는 되는 여행자니까. 아 그런데 이성을 멈추기엔 술이 너무 적었단 말이야. 맥주 1병으로는 어림없는 걸. 


노래가 바뀌면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들에겐 유명한 곡이었는지 작은 무대가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이쯤에서 테이블로 슬슬 돌아가려니 나를 데리고 나온 아이가 따라온다. 그리고 나에게 한쪽 얼굴을 내밀었다. 처음엔 그게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채지 못했다. 머뭇거리자 자기 뺨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어쭈, 이것 봐라? 어이가 없어 웃자 좋아서 웃는 줄 알았는지 더 가까이 온다. 


"너 몇 살이야?"


내 질문에 얼굴도 안 돌리고 대답을 한다.


"16살. 너는?"


내 나이 알면 깜짝 놀랄 테니 그건 몰라도 되고. 16살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차라리 네가 23살쯤 됐다면 갈등했을 것 같은데 16살이라면,  볼뽀뽀 정도는 괜찮은 것 같아. 고맙다. 덕분에 오랜만에 춤도 추고. 그런 뜻으로 말이야. 


아침을 먹으러 호스텔 카페로 가며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어제 만난 아이들을 만나면 뭐라고 하지? 


'안녕? 그래 맞아, 내가 어제 만난 그 사람이야. 밝은 데서 보니까 잘 모르겠지? 하하하!'


늦게 내려간 탓에 카페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구석에 앉아 뻣뻣한 토스트를 뜯으며 카페를 둘러보았다. 학교 식당에 앉아 있는 듯 앳된 아이들이 재잘대며 먹고 있었다. 떡진 머리 하며, 세수는 하고 나온 건지 눈곱까지 달고 있을 것 같은 꾀죄죄한 얼굴의 소년들과 스모키 소녀들은 다 어디 가고 색색의 눈동자를 굴리면 깔깔대는 

아이들만 있었다. 파티에 나를 불렀던 소녀도 검은 눈 화장을 지우고 저기 어딘가에 앉아 있겠지. 내게 뽀뽀를 해달라며 뺨을 내밀던 덜 자란 소년은 저기 떡진 머리를 한 아이였던가?

암스테르담에 간다고 했더니 다들 거긴 볼 게 없다고 했다.  그래서 딱 하루만 있기로 하고 감자튀김을 마요네즈에 찍어먹으며  하릴없이 운하를 따라 거닐었다. 아직도 정체를 모르겠는 한 무리의 십 대들과 보냈던 어제의 밤이 암스테르담의 기억의 전부가 될지도 모르겠다. 취하지도 않던 맥주 1병에 왜 그만 멈추었을까. 2번째부터 돈을 내야 했다면 얼마 인지나 물어볼걸. 마음까지 궁색해진 여행자여, 오늘은 취할 때까지 마셔볼까.  여기가 아닌 다른 그곳에서는 말이지. 

        


사진이 없는 여행기가 어떤가요?

사진이 없어도 재미 있는 글을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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