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작가 Jun 12. 2018

첫 여행은 아니고, 출장

일본_도쿠시마

당시 나는 아침 토크쇼의 막내 작가였다.

그때 아침 토크쇼에서 유행하던 구성이라는 게 연예인들을 초대해 인테리어 협찬을 잔뜩 해준 뒤 집 구경을 하거나, 해외여행을 협찬해주고 따라가 가족여행을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막내 작가였던 내가 주로 했던 일은 협찬사에 일일이 전화를 걸어 이러이러한 연예인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데 가족 여행을 가려고 한다, 너희 회사 여행 상품 중에 맞는 게 있으면 협찬하는 게 어떻겠니? 같은 걸 물어보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협찬을 대행하는 회사도 있고 제작사마다 협찬을 전문으로 하는 담당자가 있다지만 그때는 그런 일들이 모두 막내 작가의 몫이었다. 그렇게 해서 해외여행을 보내 주거나, 결혼한다면 혼수를 마련해 줬으며, 이사를 하면 집을 인테리어 해준 연예인이 수십 명에 달했다. 알고 보니 나는 협찬 따내기의 귀재였던 걸까? 숨겨진 재능을 미처 알지도 못하고 그렇게 남 좋은 일만 실컷 하다가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카메라 찍을 줄 알지?"


촬영 나갈 피디를 물색하던 팀장이 갑자기 나에게 한 말이었다. 만화처럼 나는 내 뒤에 누가 있나 싶어 뒤를 돌아봤다. 분명 나한테 한 말이었다. 나보고 피디 대신 촬영을 나가란 말인가?


“김피디한테 좀 배워서  촬영해 와라.”


지금도 그때의 상황이 완벽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피디가 없어도 막내 작가에게 촬영을 해오라고 카메라를 던져주는 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회사 내 피디 인력이 없을 경우 대부분 프리랜서 피디를 고용해 촬영과 편집을 맡기던지, 그것도 아니면 촬영만 전문적으로 하는 VJ를 구하게 된다. 아무리 외부 인력에 쓰는 비용을 아끼려 한다 해도 막내 작가에게 촬영을 시키는 경우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때 나는 이게 이상하다고 생각도 못할 만큼 어리숙했다. 그냥 해외에 나간다는 게 좋았다. 그것도 내 돈 들이고 가는 게 아니라 회사 돈으로 가는 출장이라는 게 좋았다. 그 길로 카메라를 배우러 김피디를 만나러 간 게 아니라 여권 사진을 찍으러 갔다. 그때 나는 아직 여권도 없는 '해외 초보'였다.

    



 인천공항에서 연예인 가족 4명과 만났다. 금슬 좋기로 유명했던 연예인 부부와 두 딸이 동반한 여행. 부부는 자주 나왔지만 딸들까지 함께 하는 여행은 처음이었다. 장소는 그때만 해도 생소했던 일본의 도쿠시마였다.

스텝이라고는 달랑 나 하나. 여행을 안내할 관계자는 일본에 도착해서 만나기로 했으니 여기서부터는 내가 이들을 이끌고 일본에 잘 도착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어땠나. 카메라 가방에 내 짐가방에 주렁주렁 들고 내 한 몸 가누기도 힘든 초짜인 데다가 해외는 처음 나간다는 설렘까지 감추지 못하는 아마추어였다. 


“여보, 서작가는 해외 처음 가는 거래.” 

(아니 왜 작가가 촬영을 나온 거야?)


“어머 그래? 가서 좋은 거 많이 보고 재밌게 보내야겠다.”

(이런 초짜를 믿어도 되는 건가?)


연예인 부부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저런 속마음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그저 비행기 탈 생각에 신이 나 있었겠지. 

그럼에도 카메라 가방이 벌써부터 어깨를 짓눌렀다. 출발 전 김피디는 나에게 카메라 작동법을 알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오토로 놓고 찍어. 켜고 끄는 건 알지? 뭐 이상한 거 만지지 마. 냥 찍어. 편집은 내가 할 테니까.”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많이 찍어야 뭘 건져도 건질 거 아닌가. 그래서 무작정 찍기 시작했다. 풍경을 보는 가족, 음식을 먹는 가족, 쇼핑하는 가족, 아이들과 부부의 모습 등등. 

클로즈업 따위 없는 무조건 풀샷 스케치. 다음 날 아침 팔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찍었던 첫날의 촬영분은 방송에 단 한 컷도 나오지 않았다.




“언니도 같이 가자~”


6살이었던 부부의 둘째 딸은 유난히 나를 잘 따랐다. 촬영 내내 나를 따라다니더니 급기야 엄마와 온천욕을 하러 가면서 나에게 같이 가자고 권했다. 저녁도 먹고 촬영도 모두 끝나고 이제 좀 쉬나 싶었는데 꼬마의 눈치 없는 제안이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출연자와 목욕이라니. 아이 엄마와 내가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는 동안 아이는 내 손을 끌고 온천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욕장에서 서로 모르는 척 몸을 씻고 서둘러 야외 온천에 몸을 담갔다. 아직은 밤공기가 차가운 4월 초. 뜨거운 물 안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코끝으로 차가운 봄바람이 스치며 열기를 식혀주었다. 하늘엔 별이 쏟아질 듯 박혀 있었다. 첩첩 산속에 위치한 이 유서 깊은 여관은 밤하늘마저 조명으로 쓰며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떨어지는 것은 벚꽃잎! 


협찬사에서는 조금만 일찍 왔으면 일본의 그 유명한 벚꽃놀이를 볼 수 있었을 거라고 아쉬워했는데 산속의 나무들은 이제야 꽃비를 뿌리고 있었다. 

따뜻한 몸과 차가운 머리,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이 유성우가 되어 떨어지는 것 같은 꽃잎. 

이건 꿈인가? 

아무리 처음이어도 그렇지, 여행이란 원래 이렇게 좋은 걸까? 

어깨를 짓누르던 카메라 가방도, 뭘 찍어야 하는지 몰라서 막 찍어대던 난감함도, 연예인 부부가 갑자기 냉랭해서 왜 그런지 눈치 보던 조바심도, 아이들을 혼내던 부부 때문에 나까지 주눅 들었던 초라함도 그 순간만은 잊었다. 지금 이 순간만은 나도 여행자이고 싶었다.




그 후 이야기

-2박 3일 내내 무작정 찍어대었던 촬영 영상은 겨우 '8분' 방송되었다. (그것도 겨우 만들었다.)

-편집하는 내내 김피디는 짜증을 많이 내었다. (그럼 네가 가지 그랬어!)  

-피디는 아이들과 놀아 주려고 내 방에서 장난 삼아 찍었던 장면을 좋아했다. (그냥 찍은 건데?)

-이후로 나에게 촬영을 맡기는 출장은 다시 없었다.

-이때 했던 여행(?)이 내 인생 최고의 럭셔리 여행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금슬 좋기로 유명했던 이 부부는 몇 년 후 이혼했다. (2박 3일 동안에도 자주 냉랭하더라니...)




사진이 없는 여행기가 어떤가요?

사진이 없어도 재미 있는 글을 쓸게요.

좋아요, 힘나는 댓글  환영합니다.

다음 글을 바로 쓸 수 있도록 저를 흔들어 주세요!






작가의 이전글 공짜 맥주라면 영혼이라도 팔겠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