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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작가 Oct 08. 2018

그녀가 음악방송에 간 이유

뜻밖의 일. 코. 해. 제.

이런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처음일지도 모른다. 

중학교 2학년 때 고등학생이었던 첫사랑 오빠가 골목에서 안아주었을 때 이런 느낌이었나? 아니다. 

이건 그보다 순수하지 않고 끈적이며 멈출 수 없는 충동과 뜨거운 욕망이 부글대는, 호르몬 과잉의 위험한 소년의 밤 같다. 


공개홀에는 이미 그를 보기 위해 밤을 새웠을 것 같은 아이들이 후줄근하지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줄을 서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관계자에게 내 이름을 말하자 얇은 종이끈을 내 손목에 둘러준다. 

아, 이게 말하자면 입장권 같은 것이로군. 이런 건 에버랜드에서나 받아본 게 최근 일인데. 그나저나 내 이름을 체크하는 종이에서 언뜻 생년월일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애써 무시한다. 


내 나이를 묻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고 싶은 열망과 혹시 닿을 수 있는 건 아닐까, 헛된 바람으로 아이들은 앞으로 앞으로 밀어댔지만 나는 뒤로 뒤로 물러났다. 


안돼, 카메라에 얼굴이라도 잡히면 어쩌려고. 

아쉽지만 여기까지야. 

너와 나의 거리. 

불과 4-5미터. 충분해. 

나는 눈 감고도 너를 그릴 수 있거든. 


보이지는 않지만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이 나 있을 것이 분명한 얼굴은 앳되고 어딘가 미덥지 못해서 뒤돌아보게 한다. 내가 뒤돌아 보면 분명 넌 웃을 거야. 눈이 안 보이게 웃으며 삐뚤삐뚤한 치열마저 사랑스럽게 만들며 나를 녹아내리게 하겠지. 오른쪽 눈 밑에 그 점은 오직 너뿐이라는 걸 증명하는 도장 같아. 하얀 얼굴에 콕 박힌 그 점마저 특별한 걸 보면 뭐 하나 허투루 있는 게 없지. 그게 무엇이라도 너의 것이라면 나는 다 말할 수 있어. 


그 긴 다리와 팔은 춤을 추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휘저으며 발은 사뿐히 내딛지. 그런 눈빛으로 허벅지를 쓰다듬는 건 누가 알려준 거야. 소년 같은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짓다니. 우스워서 픽 웃음이 났지만 사실 꿀꺽 침을 삼켜버렸어. 지금, 셔츠를 들어 올릴 차례. 난 결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아.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이지만 영원처럼 기억되는 너의 하이라이트. 셔츠를 들어 올리는 그 순간 일부러 배에 힘 딱 주고 있는 거 다 아는데, 나도 다 아는데 또 숨 쉬는 걸 잊었다. 밀린 숨을 몰아 쉬며 끝으로 향해가는 걸 미리 아쉬워하는 나. 


많은 아이들 속에서도 나는 너를 찾을 수 있어. 눈을 감아도 이쯤엔 네가 어디에 있을지, 팔은 어떻게, 발은 어떻게, 표정은 또 어떻게 하는지 다 알 수 있다니까. 그리고 눈을 뜨면 너는 나를 본다. 웃는다. 그리고 엔딩. 


너무 짧아서 순식간에 지나간 그 시간 안에서도 나는 달아올랐고 숨을 멈추다가 헉 내뱉고 곧 눈물을 쏟을 것처럼 입술을 깨문다. 차라리 울고 싶은데 이 지랄 맞은 방어가 그걸 가로막는다. 차라리 울어서 네가 나를 보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오빠가 나를 보았다’며 흥분한 소녀들과 함께 줄을 서서 공개홀을 나선다. 소녀야 미안하지만 너네 오빠는 너를 보지 않았어. 네 뒤에 나를 보았어. 하지만 너를 위해 굳이 사실을 말하지는 않을게. 내가 네 맘을 모르면 누가 알겠니? 


꺼놓았던 휴대폰을 켜자 메시지가 다다닥 들어온다. 무슨 일이야.


-ㅇㅇ엄마, 오늘 음악방송 갔어? 자기 TV에 나오더라.


오. 마이. 갓! 


카메라에 잡힐까 봐 일부러 뒤에 서 있었는데 내 얼굴이 나왔단 말인가? 이렇게 갑자기 일코 해제하기엔 마음의 준비가 아직 안되었는데. 뭐라고 하지? 나 아니라고 할까? 아님 아이가 가자고 해서 억지로 갔다고 할까? 이제껏 동네에서 쌓아온 나의 이미지는 이렇게 사라지는구나. 


그런데 잠깐만. 

한창 저녁 하느라 바쁜 그 시간에 그녀는 왜 그 방송을 보고 있었던 걸까? 얼마나 자세히 봤으면 객석의 나를 알아본 거야? 

당신도 혹시?! 








이 글의 진짜 제목은 

<강다니엘, 에너제틱한 너의 이름을 갖고 싶어 뷰티풀 부메랑으로 내 마음의 불을 활활 켜줘>입니다.

왜인지는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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