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업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작가 Oct 24. 2018

방송 글을 쓸 때 조금 다른 한 가지

때로는 뻔한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요즘 하고 있는 방송 일은 매월 한 명씩 배우를 선정해서 그 배우에 대한 소개와 차기작 예고 등을 담은 짧은 트레일러 형식의 영상물을 만드는 일이다. 선정되는 배우는 대개 그 채널에서 새로 방송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라서 결국 배우 예찬을 표방한 드라마 예고라고 할 수 있다. 


2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영상물이다 보니 구성은 거의 정해진 편이다.

 

-필모그래피 영상과 배우의 개성과 연기 철학 (예전부터 잘했던 이 배우! 과거 예찬)

-차기작을 준비하는 배우에 대한 기대 

 (이 잘하는 배우가 새 작품에 들어간대! 배우 칭찬하며 은근슬쩍 드라마 홍보)

-이런 배우가 출연하는 차기작은 당연히 꼭 봐야 함 

 (이 멋진 배우와 재미있을 것 같은 드라마가 시작된다니! 당근 꼭 봐야지! 본격 드라마 홍보)


매달 비슷한 구성이 이어지지만  이 2분짜리가 나를 가장 피 마르게 한다. 

작가들은 흔히 30분짜리보다 1시간짜리 쓰는 게 더 쉽고, 5분짜리 쓰느니 1시간 분량 원고를 쓰는 게 낫다고들 한다. 그만큼 짧은 시간 안에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제대로 담기 어렵다는 뜻이다. 할 말이 없어 만들어 내는 것도 힘들지만 많은 말을 줄이고 줄여 엑기스를 '제대로' 뽑아내는 건 더 힘들다. 게다가 시간이 줄어들수록 원고료도 줄어드니 1시간이나 5분이나 들어가는 노동 에너지는 비슷하니 차라리 1시간짜리 원고 쓰고 원고료 많이 받는 게 낫다는 뜻도 되겠다.  


"서 작가, 이런 표현 말고 다른 거 뭐 없을까?

 뭔가 이 단어만으로는 부족한데... 더 확실한 거 없나?

 딱 들어맞는 그런 말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그게 뭔지 네가 좀 찾아서 알려주면 안 되겠니?


피디가 말하는 '그것'을 찾아 원고를 고치고 고치는 동안 점점 어휘력이 바닥나기 시작한다. 유의어들을 찾아가며 이리저리 조합하고, 배우의 인터뷰나 기사의 제목들도 슬쩍 카피해 보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 이 배우는 말 안 해도 다 아는 딱 '그 느낌'인데 '그 느낌'을 정확히 표현해줄 그 신선한 단어와 표현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내가 당신을 새롭게 정의해 주리라!
이제껏 당신을 설명하던 식상하고 한물 간 단어들은 잊고
오직 나만 쓸 수 있는 표현으로 당신을 말하리라! 



이런 불타오르는 창작열의는... 당연히 없고 나의 빈약한 표현력에 자괴감을 느끼며 그 화를 못 이겨 그럴 거면 네가 쓰든지! 하는 고약한 심보로 피디를 (혼자서 조용히) 욕하게 된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 난 더 이상은 못 하겠다! 라며 원고를 보내버리는데 때때로 망설이며 보낸 원고에서 의외의 오케이를 받거나 심지어 좋았다는 피드백도 받는다. 왜 내가 좋다는 것과 피디가 좋다는 거의 교차점이 다른 걸까.


-20년 연기 인생, 열정 그 자체


"열정이란 단어 너무 촌스럽지 않아?"

"그래도 열정 말고 비슷한 단어로 바꿔서 그 배우 말하면 왠지 느낌이 안 살아. 그 배우는 열정이 맞지."


열정이란 단어를 쓰기 싫어서 열정과 비슷한 무수한 단어들을 대치해 써서 보냈지만 '이거 말고 다른 거'를 찾던 피디는 결국 '열정'이란 단어에 오케이를 했다. 오케이를 받고도 저 '열정'이란 단어가 거슬려서 미련을 못 버리자 피디가 말했다. 


시청자들은 열정이란 말과 그 배우를 동시에 떠올릴 거야. 
우리가 잘 아는 그 배우에 대해 말하는데
시청자들도 그 순간 납득이 되고 자연스러워야지.
너무 힘 빼지 마. 때로는 뻔한 게 더 좋을 때도 있어.


한동안 책을 쓰고, 방송 글이 아닌 긴 글을 쓰면서 단어와 표현에 구태의연함을 버리고자 노력했다. 같은 표현도 다르게 써보고, 낯선 단어들을 일부러 골라 쓰기도 했다. 짧은 한 줄의 문장도 다르게, 새롭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방송 글을 쓰면서도 이어진 모양이다. 물론 방송이나, 책이나, 기사나 뭐 하여튼 글은 새롭게 써야 하는 건 맞다. 늘 같은 표현, 남들 다 쓰는 단어, 식상한 수식 등은 지양해야 마땅하지만 새로운 것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특히 '듣는 글'을 쓰는  방송작가라면 새로운 표현과 단어를 고민하는 것과 동시에 영상과 자연스럽게 매칭 되는 글을 써야 한다.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이 들으며 납득할 수 있는 표현과 단어들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새로워도 듣고 있는 시청자가 '어? 뭐라는 거지? 무슨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면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자막이 있어도 '각주'를 달아줄 순 없으니까) 


20년째 열정을 이름처럼 달고 사는 그 배우를 다른 단어로 설명하고 싶었는데 결국 실패했다. 그건 나의 능력 부족일 수도 있고, 그에게 열정 말고 어떤 단어도 아직은 낯선 탓도 있을 것이다. 그 배우에게 열정이란 단어를 처음 붙여준 이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참 찰떡같이 잘 붙여줬다. 20년째 유효하다면 촌스러워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연기 변신에 성공해서 열정 말고 다른 수식을 붙일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그 수식을 내가 먼저 붙여버릴 테니. 나는 이미 그를 설명하기 위해 열정을 대신할 수십 개의 단어를 확보하고 있으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가 음악방송에 간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