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서글픈 그녀의 호들갑
그가 물었다.
차에 타서 히터를 켜고 안전벨트를 하고 기어를 D에 놓고 막 출발하기 전,
노래를 고르며 그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무슨 노래를 좋아하냐고.
회사 송년회 날이었다. 회사에서 꽤 먼 곳에서 행사를 한 탓에 집에서는 더 멀어져 진작부터 집에 갈 일이 걱정이었다.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갈 생각에 벌써부터 지쳤다. 집에 어떻게 하면 빨리, 편하게 갈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에 그가 눈에 들어왔다. 나보다 더 먼 곳에 사는 그라면 가는 길에 내려줄 수 있지 않을까? 중간에 버스 정류장에만 내려준다면 갈아타는 수고를 덜 수 있을 것이다.
가는 길에 내려달라는 부탁에 그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부탁 전 조금 망설였는데 다행이다.
사실 그와 나는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긴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업무도 크게 겹치지 않아서 오가며 인사 정도만 하는 사이였다. 회사에서 유일하게 나와 나이가 같다는 것, 나보다 더 먼 곳에 산다는 것과 같은 정보도 그저 어디서 얻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차에 태워달라는 부탁을 하다니 집이 먼 자는 이렇게 뻔뻔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차를 얻어 타긴 했는데 막상 둘이 되자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차를 가득 채웠다.
무슨 말을 하지, 하는 그때 그가 그 질문을 했다.
어떤 노래를 좋아하냐고.
그 평범한 질문에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오늘 저녁 메뉴나, 양말이 어디 있는지, 혹은 그 일은 언제 끝나냐는 그런 질문이 아니라,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이냐니. 이런 질문을 대체 언제 받아보았지? 나의 취향을 궁금해하는 사람을 만난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그가 웃었다. 차마 워너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방탄소년단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웃겼나?
다른 거? 내가 무슨 노래를 좋아하더라?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쉽고 간단한 질문에 쉽게 답을 못하다니.
왜 그러냐면요, 이런 질문은 너무 오랜만에 받아봐서요. 그게요, 언제 받아봤냐면요. 음... 10 몇 년 전? 결혼하기 전 남편이랑 처음 데이트할 때였나? 아니면 그전에 소개팅했을 때였나? 암튼 그렇게나 오래 전이거든요. 사실 이런 질문은 그럴 때나 하는 거 아닌가요? 친구나 가족들은 더 이상 내가 뭘 좋아하는지 궁금해하지 않거든요. 그건 그렇고 진짜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뭘까요? 저 혹시 내가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라고 말하는 대신,
뭐 굳이 이렇게 솔직할 필요가 있을까 싶게 자세히 대답하는 나. 그냥 아무 노래나 말해도 되잖아.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이번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저 무슨 노래를 좋아하냐는 흔한 질문에 구구절절 대답하는 저 여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괜히 차에 태워줬나 후회라도 하는 걸까?
제 발 저려 또 구구절절하려는 나. 그 어색한 웃음은 또 뭐야.
그만, 그만! 더 이상 말하지 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볼까 생각하며 가까스로 말을 멈춘다.
응?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려고 했다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같이 들으려고 했다고?
무슨 노래 좋아하냐는 질문보다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 취향을 묻다 못해 맞춰주려는 배려가 너무 낯설어서, 어색해서, 좋아서, 설레서. 그래서 이상했다.
차는 곧바로 강변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강 건너 건물들이 화려하게 불을 밝혔고 강물은 그 빛에 반짝였다. 나 지금 음악을 들으며 강변을 달리고 있구나. 얼마만이지? 조수석에 앉은 것도 오랜만이고(내가 운전을 하거나 아니면 조수석은 늘 아이 차지라서) 조용히 음악을 듣는 것도 오랜만이고(라디오를 듣거나 음악 선곡은 내 차지가 아니라서) 남편 아닌 다른 남자의 차에 탄 것도 오랜만이고 (이건 진짜 오랜만이고).
처음 듣는 이 노래는 뭘까? 노래 탓일 거야. 이런 기분은.
그 시간 동안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는 질문만큼 생소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쉬는 날에는 주로 뭘 하는지, 어떤 글을 쓰는지, 20대는 어땠는지와 같은 처음 받아보거나 너무 오랜만에 받아서 선뜻 나오지 않지만 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는 '나'에 대한 질문들.
아이와 남편 혹은 시댁 이야기 같은, 결론 없이 허공에 흩뿌려지는 네버엔딩 수다가 아닌 나의 취향과 일상에 관한 신선하고 유쾌한 이야기들.
이런 '대화'를 얼마 만에 해보는 거지? 말을 하는데 웃음이 삐죽삐죽 새어 나왔다. 마주 보고 말을 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실실 웃는 내 표정까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왜 웃는지 설명하는 건 좀 어려울 것 같으니까.
어쩌면 그는 나에 대해 전혀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일반적인 매너일 수도 있고, 어색함을 깨려는 대화의 기술일 수도 있다. 내가 아무리 방탄소년단을 좋아한다고 한들 혹시나 다시 그 차에 탔을 때 나를 위해 그 노래를 틀어줄 리도 만무하고(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어쩌면 너무 평범한 질문에 길고 길게 너무 성의껏 대답했던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당장 친구에게 톡을 보내고 싶어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어떤 남자가 나에게 무슨 노래를 좋아하냐고 물어봤어!
너 그런 질문 언제 받아봤는지 기억이나 나니?
내가 왜 흥분하는지는 오직 친구만이 이해할 것이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 질문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이건 아주 오랜만에 본인의 취향에 대한 대화를 나눠본 중년 여자의 호들갑이라고만 하기에는 조금 서글픈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