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_방콕
방콕의 쇼핑가인 씨암 파라곤에서 나와 숙소에 가려고 주머니를 뒤적이니 나오는 건 100밧짜리 지폐 한 장과 동전 몇 개뿐이었다. 백화점에서 나와 바로 갔어야 하는데 길 건너 야시장에 들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냥 구경이나 하려고 했지만 늘 그렇듯 아이는 쓸데없는 뭔가를 사달라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주머니에 돈이 얼마가 있는지도 모르고 막 쓰다니 나도 참 어지간하구나.
혹시나 숨어 있는 돈이 있을까 가방이며 주머니를 뒤적이는 나를 보며 아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게 네가 그것만 안 사도 됐잖아!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삼킨다. 돈이 없는지도 모르고 써댄 나나, 갖고 싶다고 무조건 사달라는 너나, 지금 와서 누구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니.
숙소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고 여기까지 올 때 150밧에 왔으니 잘만 하면 100밧에 가자고 흥정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당당하게 차도에 서서 뚝뚝이를 기다렸다. 저 많은 뚝뚝이 중에 100밧에 우리를 데려다 줄 차 한 대 없을까. 하지만 시간은 교통 상황이 최악인 저녁 시간대. 뚝뚝이를 기다리는 사람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앞사람들에게 차례를 놓치고서야 겨우 한 대를 잡았다. 숙소 이름을 대자 기사는 망설이지도 않고 가격을 불렀다.
뭐라고? 300밧? 이런 도둑놈을 봤나? 아까 내가 150밧에 깎지도 않고 왔거든? 날 물로 보나?
기사가 나보다 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지나쳐 앞에 있는 사람들을 태우고 떠난다. 그들은 흥정을 하지도 않고 바로 타고 떠났다. 좋겠다 네들은. 뜨리 헌드레드밧이 있어서.
이쯤 되자 약간 막막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고, 나는 돈이 없었고, 나만 바라보는 애도 있고, 다리는 끊어질 듯 아팠고, 배도 좀 고픈 것 같고. 그렇게 처량할 수가 없었다.
여기 택시가 카드가 되던가? 어디 가서 돈이라도 뽑아야 하나? 수수료가 비싸던데 숙소에 돈이 있는데 굳이 수수료를 물면서까지 돈을 뽑아야 하나? 뭐하러 야시장에 갔지? 쓸데없이 왜 그걸 샀지? 백화점엔 왜 갔지? 왜 방콕에 왔지? 이러다가 왜 태어났지까지 갈 것 같아 자책은 그만두기로 한다.
아! 그렇지! 전철이 있지! 왜 그 생각을 못한 걸까? 그런데 전철 티켓은 얼마나 하려나? 설마 둘이 100밧 넘는 건 아니겠지? 아! 돈 없는 자의 서러움이여! 전철 타는데도 돈 걱정을 하다니. 그러게 그거 엄마가 사지 말랬지!라는 말은 끝까지 꿀꺽 삼킨다. 걱정은 나만 하면 되니까.
BTS(방탄소년단 아님. 방콕 지상철)를 타려고 올라가 보니 티켓을 사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줄이 짧은 티켓 자판기는 동전만 된다고 하는데 (아니 자판기에 동전만 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럼 옆에 동전 바꾸는 기계라도 놓던가. 창구에 늘어선 이 줄을 보라지. 티켓 사다가 진 다 빠지겠다.)
우리 숙소까지 티켓이 얼마인지 몰라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방황하다가 옆에 아가씨에게 물어보니 15밧이란다. 그러니까 둘이 30밧. 동전을 세어보니 딱 30밧이 된다. 다행이다. 자판기에서 티켓을 살 수 있다. 앞에 사람들이 어떻게 표를 사는지 열심히 훔쳐보며 표 사는 법을 익혀둔다. 이런 사소한 일에서 버벅대는 건 여행자라도 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
목적지 누르고, 매수 선택하고 동전을 넣었는데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애꿎은 NEXT 버튼만 계속 눌러대고 있으니 내 뒷사람이 보다 못해 손짓을 한다.
돈 없으면 이제 그만 나오라는 듯 뒷사람이 반환된 돈을 내 손에 올려주었다.
아우 씨... 욕을 하려던 건 아니었다. 결코.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을 뿐. 아까 15밧이라고 했던 애 어디 갔어? 확 그냥 잡으러 갈까? 동전은 딱 30밧밖에 없었다. 진작 1장에 30밧이라는 걸 알았다면 창구에 줄을 섰을 것이다. 그럼 저 길고 긴 줄에 반쯤은 갔을 텐데. 슬금슬금 창구 쪽으로 가서 줄을 선다. 이미 등과 얼굴에 땀이 한 바가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긴 전철역이 왜 이렇게 더운 걸까? 야! 우리나라 지하철역이 얼마나 시원한지 알아? 이래서 어디 사람 살겠니?
아! 옹졸하고 쪼잔한 여행자여, 그러게 누가 너보고 여기 와달라고 빌었느냐? 그런 불평은 입밖에도 내지 말거라. 이 와중에 느긋하게 줄을 선 태국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내가 좀 예민했지. 돈이 없으면 원래 마음이 오그라들고 그러는 거라고.
다행히 BTS(방탄소년단 아님. 방콕 지상철)는 시원했고, 티켓을 사려고 줄을 선 시간보다 빠르게 우리를 숙소 앞 역에 내려주었다. 익숙한 동네에 오자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집에 못 갈까 봐 동동 거리던 초초함도 사라졌고 줄줄 흘러내리던 땀도 식어 제법 밤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천진한 얼굴로 나를 보며 대답하는 아이. 저보다 힘들었을 엄마를 위로하는 걸까? 아님 저 때문에 택시비도 못 남기고 다 쓴 게 미안해서 그런 걸까?
음... 저 눈빛은 틀림없는 진심이다. 이 아이는 진짜 전철이 편했던 거다.
이건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주로 내가 아이한테 하던 말인데? 어쭈 이것 봐라? 오늘 일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데? 우리가 왜 힘들게 전철을 타고 왔는데? 네가 마지막에 그것만 안 샀어도 됐잖아!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허헛 웃음이 났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진짜 돈 아끼려고. 쇼핑은 오늘로 끝이야! 라고 속으로 말한다. 미리 알아 좋을 건 없으니까.
여행이 다 그런 거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