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작가 May 15. 2019

출장 가기 딱 좋은 날입니다

베트남_하노이

어린이날에 출발하는 출장이었다.

그냥 어린이날도 아닌 일요일이어서 다음날이 대체 휴일인 연휴가 되는 그런 날이었다. 대표님은 하필 그날에 출장을 잡아 미안하다며 머쓱해하셨지만 나는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할 판이었다.


대표님, 미안하긴요!
이보다 완벽한 출장 스케줄은 없을 겁니다!


사실 나에게 5월은 추석, 설날 명절 연휴만큼이나 바쁘고 피곤한 날이 이어지는 달이다.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어버이날로 이어지는 콤보는 시집과 친정을 오가며 조카들에게는 용돈을, 부모님에게 선물과 용돈을 드림과 동시에 '특별한 날'이라는 것을 위시한 단란한 가족 식사를 위해 복잡한 인파를 뚫고 비싼 밥을 맛있지도 않게 먹거나, 혹여나 누군가(주로 어머니지만) 비싸고 복잡하니 나가지 말고 집에서 먹자고 하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면 심지어 노동까지 해야 하는, 전혀 즐겁지 않은 연휴가 이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연휴가 길어져 가족여행이라도 가게 된다면? 하... 뒷 이야기는 생략하겠다.


그런데 그 연휴의 시작에 출장을 가다니!

그것도 6박 7일의 완벽한 일정으로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다 건너뛸 수 있다니!

이거 꿈 아니죠?

같이 가는 다른  (남자) 동료는 연휴에 출장이 웬 말이냐며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 순간 다짐했다. 이 회사에 뼈를 묻으리라!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겠노라!  대표님 사.. 사.. 아니 존경합니다!


여행을 갈 때에는 어쩐지 저 가슴 밑바닥 한편에 혼자 놀러 가는 미안함이 깔려 2퍼센트 찝찝함이 있었다면 이번엔 달랐다. 나 여행 가는 거 아니고 출장 갑니다. 일하러 간다고요! 물론 말끝에 아쉬움을 묻히는 센스는 잊지 않았다.

하필 날짜가 이렇게 잡혀서... 다녀와서 연락드릴게요.
엄마가 미안해 딸! 선물 사다 줄게!


나는 프로페셔널이니까 좋아하고 있다는 걸 들키는 그런 일은 없다.

출장이 놀러 가는 게 아닌데 좋을 리 없잖아? 아무렴, 그렇고 말고!




그래서 출장이 즐겁기만 했냐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노이의 날씨는 생각보다 덥고 습해서 공항에 내리자마자 땀으로 샤워하게 만들더니 도로 위에 오토바이 행렬은 혼을 쏙 빼놓을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미팅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어졌다. 베트남어와 영어, 한국어가 오가는 정신없는 와중에 해야 할 말을 까먹지 않고 해야 한다는, 들어야 할 말는 반드시 듣고 와야 한다는 의무감에 귀와 눈에 힘을 주고 앉아 있는 일은 의외로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는 일이란 걸 출장 가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 1-2시간이라도 시간이 비면 가까운 박물관이라도 다녀와야 직성이 풀리는 여행자의 본성을 감출 수가 없어 남들보다 곱절은 바빴다. 아무리 출장이지만 베트남은 처음인데 호텔과 미팅 장소만 왔다 갔다 하는 건 너무 아까운 일 아닌가.  아침 8시에 문을 여는 베트남의 박물관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출장 마지막 날 호텔방에서 출장 이슈를 정리하기 위해 노트북을 열었다. 책상도 따로 없는 작은 호텔방이어서 거울이 달린 작은 화장대에 앉아 노트를 뒤적거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거울 속 내가 보였다. 그리고 내 뒤로 묵고 있는 작은 호텔방이 보였다. 아침을 먹고 돌아와 보니 이미 방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주름 하나 없는 이불은 지난밤 나의 흔적까지 지워내고 갓 체크인한 것 같은 방처럼 되어 있었다.


집에 가서도 매일 이렇게 누가 방을 청소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침마다 뷔페를 차려놓고 먹으라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도 이제 오늘이 마지막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노트북을 덮어버리고 마지막 날을 만끽하고 싶지만 오후에 또 미팅이 잡혀 있어 그렇게는 못하고 노트북을 주섬주섬 챙겨 방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꼭대기층을 누른다. 엘리베이터에 탈 때마다 루프탑 바가 꼭대기층에 있다는 표시를 보고 또 봤지만 갈 생각은 못했다. 그래, 내가 미팅 땡땡이는 못 쳐도 루프탑 바에서 일은 할 수 있잖아?


대낮의 루프탑 바에 나 혼자일 거라는 건 대단한 착각이었다. 그렇지, 여긴 서울이 아니라 하노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  호안끼엠 호수를 바라보며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야외 테이블에서 유유히 맥주를 마시는 여행자들이라니! 나도 서둘러 하노이 맥주를 시켜 한 모금 들이킨다.


그래, 이 맛이야!


이런 기분이라면 노트북을 열어도 괜찮다. 하노이 맥주에 호안끼엠 호수 전망인데 뭐가 문제란 말인가. 미팅 이슈를 끝내주게 정리해서 출장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겠다. 그게 성공한다면 모든 건 하노이 맥주 덕분이다.


긴긴 연휴 대신, '사랑하는' 가족들 대신, 사랑이 넘치는 패밀리 스킨십 대신, 낯선 도시에서 오직 혼자만 쓰는 방과 침대 그리고 화장실이 너무 좋아 사치처럼 느껴진 일주일 간의 출장. 이번 출장을 거울 삼아 대표님께 은근슬쩍 건의해볼까 생각 중이다.


다음 출장을 추석 연휴에 잡는 건 어떨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와 벚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