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작가, 급해서 그러는데 한 장 짜리 간단하게 기획의도 좀 써줄 수 있어? (오래간만에 연락하는 어느 피디)
-OO엄마, 우리 큰 애 자소서 좀 봐줄 수 있어? (별로 안 친한 동네 아줌마)
-아빠가 주례를 봐야 하는데 주례사 좀 써라. 작가 딸이 멋있게 한번 써 봐. (아빠)
가족부터 동네 이웃까지 '작가'인 나에게 뭘 써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다양하지만 그 내용도 참 다채롭기 짝이 없다. 물론 내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쓰는 건 맞지만 자소서와 주례사까지 나에게 써달라는 건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거야? 너는 작가니까!
거절하기 힘든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 대충이라도 부탁을 들어주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다 보니 부탁을 하는 사람이나 들어주는 사람이나 만족할만한 결과가 당연히 안 나온다.
'한 장 짜리'를 입에 달고 살던 피디는 기껏 한 장 써주면 뭔가 더 그럴듯하게 한 줄만 더 써달라고 하지를 않나, 내일 결혼식에 쓸 주례사를 지금 당장 써내라고 아빠는 닦달을 하시고, 입시 자소서는 잘 모른다고 해도 극구 괜찮다고 하던(대체 뭐가 괜찮다는 건지) 동네 아줌마는 실컷 고쳐준 자소에 대한 피드백을 해주지도 않았다. (내가 봐준 자소서로 그 애가 대학에 갔는지 어쨌는지도 모른다.)
부탁을 할 때는 내 능력 아니면 그 누구도 그 글을 쓸 수 없을 것처럼 말하던 이들이지만 원하는 걸 얻고 나면 결과물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도 별로 못 들었던 것 같다.
뭐, 작가는 그 정도는 눈감고라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누나, 독후감 좀 써주라. 이거 안내면 인사고과에 반영돼서 꼭 써야 하는데 내가 시간이..."
"10만 원!"
"뭐라고? 누나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야! 나 작가야! 내 시간과 재능을 들여서 글을 쓰는데 공짜가 어딨어. 가수한테 공짜로 노래 불러달라고 하면 그거 엄청난 실례인 거 몰라?"
"와... 누나..."
"싫음 말고!"
"... 5만 원!"
"좋아. 처음이니까 싸게 해 준다."
내 재능으로 세상을 밝게 해주는 발전적 기부라면야 내가 얼마든지 할 의향이 있지만 이런 개인적인 기부라면 이제부터라도 사양할 예정이다. 그깟 글 몇 줄 쓰는 걸로 생색낸다고 얘기한다면 직접 쓰면 될 일이다. '그깟 글 몇 줄'이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제 내게 글을 원하는 부탁을 한다면 당당하게 말해보려 한다.
자, 글은 내가 쓸게. 돈은 누가 낼래?
덧. 돈 받고 써준 독후감은 다시 되돌아왔다. 너무 잘 써서 본인이 쓰지 않은 게 티가 난다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