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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작가 Jun 01. 2020

2002년 월드컵 제발 지라고 빌었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월드컵의 추억

이맘 때쯤이면 어김없이 2002년 월드컵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온다.

대한민국 전체가 붉은 악마가 되어 '대~한민국'을 외쳤던 그 때.

벌써 18년 전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나에게도 2002년은 바로 엊그제처럼 떠오른다.


그 때 나는 한 아침 토크쇼의 막내작가였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제작팀의 막내작가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못하는 것도 없어야 하는 1인 다역의 만능 노동자다. 때문에 그때 나는 누구보다 바쁘고 정신없이 매일을 보내는 중이었다.

온 나라가 이미 몇달 전부터 월드컵에 대한 기대와 흥분에 들썩이고 있었지만 나는 월드컵에 신경을 쓸 여력도 기력도 없었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축구에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주로 연예인이 출연하던 토크쇼 제작팀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축구든, 월드컵이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어떻게 하면 선배들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해낼지, 실수하지 않을지 하루하루 전전긍긍하던 막내작가였으므로 더더욱 나는 월드컵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월드컵이, 축구가, 하루아침에 내 인생에 최대 관심사가 된 건 바로 그날 우리나라의 첫 경기가 있었던 2002년 6월 4일이었다.  


국가대표 선수들의 연락처를 알아내라!

폴란드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이긴 후 온 나라가 승리의 흥분으로 슬슬 들끓기 시작했다.

월드컵에서의 사상 첫 승리.
2대0의 완벽한 승리.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긴장감.


모든 TV프로그램이 축구, 월드컵, 대표선수에 관한 것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그때만큼은 어떤 연예인이 와도 축구선수만큼 궁금하지 않았고 사람들도 열광하지 않았다. 오직 궁금한 것은 국민 전체가 대~한민국을 외치게 만드는 국가대표 선수들이었다.

우리 프로그램도 예외가 아니어서 경기 중인 선수들을 섭외할 수는 없으니 선수들의 가족이라도 섭외하여 그들에게서 선수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기획했다.


그렇다면, 국가대표 선수들의 연락처를 어디서 알아내지?

나에게 떨어진 이 절체절명의 미션을 반드시 수행해야만 전쟁같은 섭외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못하는 것도 없어야만 했던 막내작가 최고의 숙제.

하지만 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안녕하세요? ㅇㅇㅇ 방송사의 ㅁㅁㅁㅁ 프로그램 제작팀인데요. 혹시 *** 선수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뭘 몰라서 용감했던 걸까. 다른 제작팀들이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동원할 때 나는 곧바로 국가대표 선수들 전체를 관리하는 부서에 문의를 했다.


"선수는 지금 경기 중이어서 연락이 어려우니 부모님 연락처를 알려드릴게요."


믿을 수 없겠지만 이건 실화다. 개인정보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 같지 않았을 때이기도 했고 나처럼 다짜고짜 직접 물어본 사람은 아마 처음이었는지 직원은 거리낌 없이 알려주었다. 그렇게 몇번 이 선수, 저 선수의 연락처를 물어보았더니 담당자는 귀찮았던지 선수 전체의 연락처를 알려주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18년 전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거의 모든 선수의 연락처를 갖게 된 나는 완벽히 미션을 수행하게 된다. (이후에 내가 선수들의 연락처를 갖고 있다는 것이 방송가에 소문이 나서 온갖 프로그램 작가들이 나에게 연락을 해서 선수들의 연락처를 물어보기도 했다. 로또 1등 복권을 쥔 것마냥 내게는 그 연락처 리스트가 보물단지였다.)      


그 사이 월드컵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졌다. 대한민국 전체가 붉은악마가 되었고, 경기가 있는 날이면 붉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다. 그리고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우리 선수들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나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우리나라가 이기면 이길수록 섭외 미션은 늘어갔기 때문이었다.


폴란드전에서 첫 골을 넣은 선수이자 미국전에서 부상투혼을 펼친 황선홍 선수
미국전에서 미국 선수들과 터프한 몸싸움을 했던 김남일 선수
포르투갈전에서 골을 넣은 박지성 선수
16강 이탈리아전에서 동점골을 넣은 설기현 선수
반지 세리머니의 안정환 선수


매 경기마다 화제가 되는 선수가 있었고 처음에는 그 선수들을 위주로  섭외를 하기도 했지만 16강 경기 이후에는 선수를 가릴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국민의 영웅이고 스타가 되었기 때문에 누구랄 것도 없이, 누구라도 섭외하는 것에 방송가의 모든 프로그램이 사활을 걸었다. 섭외 전쟁에 뛰어든 나는 제발 이 경기가 마지막이기를, 그만 이기기를 바랐다. 월드컵은 이미 나에게 축제가 아니라 일에 일을 더해주는 것뿐이었다.



이 망할 놈의 월드컵 빨리 끝나라, 끝나라 매일 빌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축구를 잘하는지 선수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제 그만큼 했으면 충분하잖아요. 이제 끝냅시다,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월드컵이 끝나기 직전까지 경기를 하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적을 실행하셨다.


그래서 누굴 섭외했냐고?

그건 다음 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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