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피랙

1화

by 블루베이글

서울의 어느 오래된 다세대주택 B101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마치 지구가 자전하듯 조용히 이루어진다. 그녀는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 색연필을 집어 탁상달력의 어제 날짜 칸에 대각선을 그었다. 짧지만 진지한 파란색 선이 세상에 존재하게 됨과 동시에 그녀의 어제가 완성되었다. 매일 어딘가로 출근을 하지는 않지만, 날짜개념이 명확하다. 시간은 그렇게 매일 틀림없이 흘러가고 있지만, 자신은 B101호에서 멈춰진 상태로 있다는 사실을 오늘도 뼛속까지 느끼며 탁상달력을 제자리에 놓는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머그컵에 멈춘 시선은 거기에 적혀있는 윤 소 라, 이 세 글자를 몇 초 동안 응시한다. 자신의 이름이지만 이젠 너무 낯설다. 예전에 영어화상수업 강사로 일했을 때 회사에서 준 건데 지금은 연필꽂이로 사용하고 있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깨지고 부서칠 테니깐. 그리고 지금과 다르게 그때의 윤소라는 사람을 좋아하고 항상 웃는 얼굴이었다는 사실을 그나마 이렇게라도 기억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더는 기댈 곳도 없고 쉴 수도 없다. 빈 껍데기가 된 것 같은 몸으로 무작정 옥탑방을 빠져나와 서울의 어느 골목길을 빠르게 걷고 있다. 봄인데도 겨울처럼 옷을 입은 어느 할머니를 지나쳤고 폐지를 주워 담고 있는 깡마른 할아버지도 지나쳤다. 골목에서 마주치는 어느 사람도 서로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세상에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봄이고 낮이고 햇빛이 충만한데 그는 밤이고 춥고 외로웠다. 츄리닝바지와 긴 팔 후드티를 입은 그를 눈여겨보는 존재는 담벼락 위에 웅크리고 있는 길고양이밖에 없었다.

어느 골목에 다다르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오래된 다세대주택들과 허름한 대문의 집들만이 마치 비어있는 영화 세트장처럼 그의 앞에 펼쳐졌다.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안전하다는 뜻이었기에 그의 발걸음도 속도를 늦췄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데, 어느 다세대주택의 반지하 현관문이 반쯤 열려있는 게 아닌가!

‘요즘 세상에 문을 열어놓고 사는 사람이 있다고? 아무도 안 사는 집인가?’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발걸음은 이미 열린 문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도어록이 아닌 열쇠로 여는 문이었다. 반쯤 열려있는 문을 열자 반지하답지 않게 향긋하고 쾌적한 공기가 느껴졌고 현관에는 운동화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조용히 한 걸음 내디뎌 소리가 나지 않게 현관문을 닫은 후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면서 눈으로는 집 안에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집주인의 존재를 찾았다. 거실을 거쳐 부엌 그리고 방 하나까지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욕실만 확인하면 되는데, 욕실 문의 손잡이를 잡으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고 하얀 피부에 안경을 쓴 젊은 여자가 놀란 얼굴로 남자 앞에 섰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에 당황한 남자는 한 손으로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막았다(여자에게서 체리향이 났다…….). 처음에는 심하게 발버둥을 치던 여자가 어느 순간 저항을 멈추더니 남자의 손에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여자가 뭐라고 웅얼거렸다.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는 천천히 손을 거두면서 안경 쓴 여자의 눈을 보았는데, 그 눈은 착하고 지혜롭고 또 착한 눈이었다. 예쁘기도 했다. 남자의 손에서 풀려난 여자의 도톰한 입술이 움직였다.

“무엇을 원하시나요…….?”

여자의 목소리는 약간 떨렸지만 지금 이 상황이 크게 두렵지 않은 듯했다. 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원하는 게 뭐지…….?’

남자가 바로 답을 하지 않자 여자는 남자의 손을 잡고 거실에 있는 소파로 남자를 이끌었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서서 여자가 부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경찰을 부르려고 핸드폰을 찾는 건가?’

하지만 여자는 뭔가를 찾는 듯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헝클어진 긴 머리와 수면 잠옷 차림의 그녀는 그렇게 봄바람에 나부끼는 꽃잎처럼 부엌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여자의 행동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느새 거실에 있는 낡고 편안해 보이는 2인용 소파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한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니 떼지 못했다. 그의 시간은 잠깐 정지했다가 집 안에 퍼진 커피향기를 맡고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을 침입한 낯선 남자에게 커피 대접이라니. 영화 세트장 같은 골목에 들어왔을 때부터 영화의 한 장면에 들어온 건가? 남자는 도저히 현실감이 안 드는 이 상황에 조금 얼이 빠져 있었다.

“여기요, 드세요…….”

여자는 쟁반을 바닥에 놓고 자신이 마실 커피가 든 머그컵을 들고 남자가 마실 수 있도록 쟁반을 남자 쪽으로 살며시 밀었다.

“이게 제 모닝커피예요. 모닝커피를 누군가와 함께 마시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여자는 마치 남자가 멀리서 찾아온 친구라도 되는 듯 말했다.

남자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끈하고 달콤하고 살짝 쓰고 맛있다!’

이렇게 커피를 음미하면서 마실 수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정처 없이 불안하게 빨리 걸었던 몸은 커피가 들어가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왜 소리를 지르지 않지? 왜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고 낯선 침입자에게 커피를 대접하지?’

그는 그녀의 이 모든 행동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마치 인어공주에게 홀린 어부처럼 그녀를 바라보며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마시고 있었다.




반지하라서 환기가 잘 안 되는 탓에 아주 가끔 문을 열어놓는데 그동안 한 번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일까?’

남자의 손이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동안 여자는 그동안 보았던 모든 범죄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발버둥을 치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으니 몸에 힘을 빼고…….’

역시 효과가 있다. 남자의 몸에 들어갔던 힘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남자에게 말을 걸어 안심시킨 후 집에서 탈출하자. 신발 따위는 신을 겨를이 없으니…….’

‘아, 그런데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아. 오히려 도망가다 잡히면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그런데 남자에게서 헤이즐넛 향이 섞인 담배 냄새가 났다.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런 짓을 하기에는 그의 눈은 너무 착하고 순수해 보였다. 그 눈빛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용기가 솟구쳐 이렇게 말했다.

“무으으 워나스나여.”

말을 알아듣지 못한 남자가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오른손을 떼자 여자는 다시 말했다.

“무엇을 원하시나요?”

남자가 대답은 하지 않고 얼빠진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여자는 더욱 용기가 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은 남자를 자극할 수 있기에 최대한 천천히 조심스럽게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을 잡아 거실에 있는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그를 거기 세워둔 채, 자신은 부엌으로 걸어가 커피포트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선반에서 머그컵 두 개를 꺼내 믹스커피를 털어 넣었다. 물이 끓기까지의 시간이 마치 천만년은 되는 것 같았다. 끓는 물을 붓고 숟가락으로 젓자 온 집안에 커피향기가 퍼졌다. 커피를 타면서 이렇게까지 긴장하기는 처음이었다. 남자가 뒤로 와서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러기에 남자는 거실 소파에 너무도 차분히 앉아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제 모닝커피예요. 모닝커피를 누군가와 함께 마시는 건 정말 오랜만이네요.”

이 말을 내뱉고는,

‘도대체 이런 말을 왜 하는 거야? 너 지금 제정신이니? 정신 차려, 윤소라!’

라고 속으로 외쳤다.

소파에 앉아있던 남자는 여자와 마주 앉기 위해 바닥으로 내려와 앉았다. 둘은 말없이 머그컵에 든 커피가 사라질 때까지 커피만 마셨다. 숨소리, 커피 마시는 소리, 그들의 심장이 조용히 뛰는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늘따라 이 동네의 모든 사람이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해 숨죽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까 화장실에서 여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 남자는 여자의 눈을 자세히 보았다. 영혼이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동자! 바깥세상에서는 이제 그런 눈을 보는 일이 거의 없다. 마치 멸종위기 인간처럼 말이다.

커피를 다 마신 후 남자는 여자에게 이만 가보겠다고 말했다. 이만 가보는 것 말고는 더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남자는 이 말을 하고 속으로,

‘여기가 커피숍이냐? 너 지금 뭐 하냐!’

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남자가 일어서자 자신도 일어서며,

“네 안녕히 가세요.”

라고 말하며 남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착하고 멋진 눈이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빨개짐을 느껴 급히 현관으로 남자를 안내했다. 안내할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남자는 신발을 신고는 황급히 여자의 집을 나섰다. 남자는 갔고 여자는 문을 닫고 안전고리까지 잠근 후 두근거리는 심장과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찾았다.

‘남자가 멀리 가기 전에 어서 신고해야 해.’

112를 누른 후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가 침입한 것은 맞지만 커피를 대접한 것은 그녀였고 그가 한 일이라고는 그녀가 준 커피를 마시고 가버린 것뿐이지 않은가! 신고하면 오히려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신고는 포기하고 잠시 누워 심신의 안정을 취하는 게 답이었다. 소파 아래에 베개와 이불을 가져와 누웠다. 긴장이 풀리니 몸이 나른해졌다. 방금 마신 커피의 카페인은 아무 효과가 없는 듯 헤이즐넛 향과 담배 향 그리고 체리 향이 서로 섞인 공기를 마시며 그녀는 슬며시 잠이 들었다. 지구가 자전하듯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