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피랙

2화

by 블루베이글

다음날, 아침 햇빛이 남자의 얼굴을 비췄고 남자는 마치 새로운 삶을 얻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허름하고 볼품없는 욕실이 오늘따라 사랑스러워 보였다. 수돗물을 틀고 세수를 한 후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그런 자신이 부끄러워 서둘러 욕실을 나왔다.

‘커피!’

어제 그 여자가 타 준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입고 있던 옷 그대로 현관문을 열자 아직 쌀쌀한 봄날 아침의 공기가 훅 들어왔다.

‘후드티!’

후드티를 걸쳐 입고 지퍼를 올리면서 하나뿐인 운동화를 신고는 마치 중요한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옥탑방을 나섰다. 어느새 오 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편의점주인아주머니가

“어서 오세요~!”

하고 반기셨다. 마치 그가 오늘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을 알고 축하해 주는 것처럼 밝은 목소리였다.

믹스커피가 진열되어 있는 매대에서 어제 그 커피를 발견하고는 복권에 당첨된 사람처럼 계산대로 향했다.

“아잉, 이 커피 맛있지? 총각이 커피 맛을 아네. 나도 이것만 마셔. 믹스커피 중에 이게 제일 낫더라! 5,500원이야.”

“네.”라고 답하면서 그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가진 돈이 별로 안 남았지만, 이 커피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잘 가요 총각, 항상 조심하고~!”

아주머니의 의미심장한 인사를 뒤로하고 남자는 ‘달려라**’로 시작하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처럼 힘차게 달려서 돌아와 냄비에 수돗물을 끓였다. 한 박스에 20 봉지가 들어 있는 믹스커피 중에 하나를 꺼내 뜯은 후, 딱 하나 있는 머그컵에 털어 넣었다. 어제 그 여자, 아니 윤소라 씨가 해 준 그대로 딱 그만큼만 끓은 물을 붓고 머그컵을 들고 옥탑방 밖 옥상으로 나왔다. 저 멀리 한강과 강남의 고층 건물들이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한강과 차가운 대도시를 바라보며 남자는 마치 어제처럼 커피를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하듯 마셨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남자의 얼굴에 먹구름이 지나갔다. 커피를 다 마신 남자의 머릿속이 카페인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한겨울의 한강 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 명료했다.

‘뭐부터 해야 하지?’

마음이 바빠지고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살아있다는 이 느낌!

일단 지금 마신 머그컵부터 씻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닦아진 머그컵의 짙은 파란색이 물기를 머금어 영롱하다.

‘바로 그 색이야, 그녀의 안경테 색!’

짙은 파란색 안경테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순수하고 착한 눈동자가 생각났다.

‘또 보고 싶다, 그 눈동자, 그 얼굴, 그녀를!’




어디서 아침 새소리가 들렸다.

‘벌써 아침인가!’

눈을 뜬 윤소라는 안경을 찾아 쓴 후 시계를 봤다.

‘뭐라고? 벌써 10시 38분!’

늦잠을 잤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고 서둘러 침대를 정리했다. 평소라면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모닝커피와 함께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그녀였다. 헝클어진 머리를 하나로 대충 묶으면서 욕실로 향하는데 자연스럽게 어제의 일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맞아, 어제 그 일. 의식하지 못했지만 나 엄청나게 긴장했던 거지.”

늦잠의 원인을 파악한 그녀는 초스피드로 샤워를 마치고 나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커피포트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믹스커피가 잔뜩 든 통에서 두 봉지를 집어 꺼낸 후, 끝 쪽을 엄지와 검지로 경쾌하게 ‘탁탁’ 튕긴 후 봉지 입구를 뜯고 머그컵에 털어 넣었다. 마침 커피포트의 전원 버튼이 ‘탁’ 소리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와 물이 끓었음을 알렸다. 세상과 고립되어 혼자 사는 윤소라에게 일상의 이런 작은 소리는 하루를 잘 시작했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특히나 어제 같은 일을 겪었는데도 늦잠을 잔 것 외에는 큰 타격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모닝커피가 든 머그컵을 들고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제의 그 침입자. 헤이즐넛 향과 담배 향이 나는 착한 눈의 침입자. 착한 눈과 침입자는 절대 한 문장에 있을 수 없는데 그는 그랬다. 이상하게도 윤소라는 그 침입자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인지 그리고 왜 어제 자신의 집에 침입했는지 궁금했다. 자신처럼 이렇게 세상과 고립되어 사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오늘은 윤소라가 한 달에 한 번 유일하게 외출하는 날이다. 그녀는 매달 8일, 집 밖을 나서는 위험을 감수한다. 단지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 말이다. 식료품과 생필품은 배송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그녀의 세상을 풍요롭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통로인 책을 위해서는 외출이 불가피하다. 걸어서 10분 거리인 도서관에 갔다가 편의점을 들러 돌아오면 나머지 한 달 동안은 외출 없이 살아갈 수 있다. 도서관에 가면 무인대출반납기를 이용해 누구 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고 그런 그녀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도 없다. 도서관은 원래 골목길의 길고양이처럼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고 조용히 눈으로만 세상을 읽는 그런 곳이니까. 돌아오는 길에 들를 편의점은 주인아주머니가 한결같이 착하고 좋으셔서 윤소라에게는 안전한 존재다. 그리고 어제 그 침입자. 다른 사람의 눈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너무 오랜만이다. 사실 윤소라는 그 침입자의 눈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무서운 눈일까 봐. 직장생활을 하면서 봤던 그 눈. 그 눈을 보고 나면 일에 집중할 수도 없었고 심장이 마구 뛰었다. 하지만 어제의 경우에는 이상하게 용기가 났다. 제대로 얼굴을 확인해야 경찰에 신고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읽고 싶은 책을 빌리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좋아하는 간식도 살 생각에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백팩을 어깨에 메고 운동화를 신었다. 유일한 안식처인 B101호의 현관문을 조용히 잘 닫은 후 열쇠로 잠갔다. 하나, 둘, 셋! 마음을 준비시키고 건물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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