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생이든 처음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인생이 계획대로, 생각한대로 흘러간다면 그야말로 진짜 기적일 것이다.
퇴사 직후 예기치 못한 사고로 오른팔을 크게 다쳐 골절 수술과 신경마비라는 후유증으로 5개월 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게 되었다.
오른손잡이였던 나는 밥먹기, 글쓰기, 컴퓨터, 세수하기 등등 대부분의 일상생활 자체가 불가했다. 그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 상태였음에도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해서 재활을 마치기도 전에 구직에 나섰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신세계 강남 정도 규모의 대형 백화점에 가면 간혹 볼 수 있는 백화점 안내사원이라는 직업이 있다. 내가 아르바이트했던 영화관과 의류매장이 있던 백화점에서 마침 모집공고가 떴는데, 안내데스크에 앉아 손이나 팔을 무리하게 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 같아보여 큰 고민없이 지원하게 되었다.
3. 대학 나와서 왜 이런 일을 하냐고요?
출근을 하면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높은 구두를 신는다.
백화점의 꽃이라 불리는 안내사원이기에 용모는 언제나 단정해야한다.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올려 묶고 모자를 쓴 뒤 동료와 짝을 지어 웨건 서비스를 준비한다.
정문 앞으로는 오픈을 기다리는 고객들이 서 있다. 웨건 서비스란 이들을 위해 웨건 안에 준비된 주스, 차, 커피 등을 대접하는 일이다. 노숙자들도 자주 왔다. 그들의 행색이 어떻든 상관없이 안내사원은 동등한 고객으로 그들을 대하며, 대접에 정성을 다한다.
오전 10시 반이 되면, 울려퍼지는 힘찬 오프닝곡과 함께 동료와 발걸음을 맞춰 앞으로 나선다. 문을 활짝 열고 입장하는 고객들을 향해 웃는 얼굴과 밝은 목소리로 힘차게 인사하며 백화점에서의 하루가 시작된다.
일은 편했고 솔직히 재미있었다. 점심이 제공되었고, 스케줄을 짜서 1-2시간씩 교대근무로 이뤄졌기 때문에 쉬는 시간이 많았다. 그럴 땐 휴게실에서 낮잠을 자거나 간식을 먹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아이쇼핑하는 것이 하나의 작은 행복이었다. 함께 일하는 친구와 동생들과도 죽이 잘 맞아서 근무시간이 늘 즐거웠다.
나는 서비스직이 꽤 잘 맞았다.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미스터리 쇼퍼 서비스 평가에서 전국 지점 1위에 선정되어 상품을 받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엄마와 함께하는 퇴근시간이었다. 백화점이 집 근처라, 끝나는 시간에는 엄마가 정문 앞으로 마중을 나왔고, 그러면 나는 엄마와 함께 밤거리를 산책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비록 급여가 많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일에 만족하며 다니고 있었다.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건 고객들의 시선이었다.
"아가씨는 어느 대학 나왔어요?"
"아이구... 그 학교 나와서 왜 이런 일을 해요?"
내가 대단한 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울의 4년제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왜 그런 서비스직에서 일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인 모양이었다. 의도를 가지고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기보다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딸같은 젊은 아가씨가 아까운 모양이었다.
내 선택이 누군가의 걱정거리인건가. 문득 우리 엄마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걱정하시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도 그 일을 오래 할 생각으로 구직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 일에 어떤 비전과 목표가 있어서 시작하게 된 건 아니며, 그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인간이 되길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당장 돈을 벌기 위해, 집안에 부담이 되지 않기 위해 일을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성장, 발전, 비전, 목표. 첫 회사에서 귀가 따갑게 들었던 그 허울좋은 말들.
나의 첫 회사는 신입사원이란 마땅히 그런 태도를 지녀야 하고, 항상 배우고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주입시켰다. 그러나 정작 회사가 내게 보여준 실체 아닌 실체들은 실망스럽기 그지 없었다.
꼭 그런 걸 직장에서 찾아야만 행복일까? 겉으로는 나를 위한 말들처럼 포장하고 있지만, 내가 회사에서 성장해야하는 이유가 정말 '나' 때문인지 의심스러웠다.
다시 사회복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누구는 어느 재단에 취업을 했더라, 누구는 대학원을 갔더라 하는 동기들의 소식이 종종 들려왔지만 대학원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공부를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고, 무엇보다도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싶지는 않았다.
학교 취업지원센터에라도 연락해볼까 하고 홈페이지를 뒤적거리던 중, 모교의 행정부서에서 계약직 교직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고 바로 지원하기로 했다.
학교로 직장을 옮기자, 사람들은 더이상 '왜 그런 일을 해요?' 라고 묻지 않았다.
비정규직이라고 할지라도 사무직이자 대학교에서 일한다는 것은 사회가 판단하기에 내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것처럼 보이도록 해주었다. 하다 못해 정규직 전환이라도 꿈꾸는 정도의 다음 스텝이 있는 사람인것처럼 말이다.
벌써 10년 전 일이지만 난 가끔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일했던 안내사원 시절을 생각한다.
그때 내가 가진 작은 평온은 누구의 허락도 필요없는, 나만의 비전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사실을 온전히 붙들 용기가 없었고, 결국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를 택했다.
모든 것이 다시 리셋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