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남해 한 달의 일기를 꺼내어)
오늘은 새벽부터 잠이 깨어 잠이 들지 않는다.
사량도로 가는 배를 타러 선착장을 가려면 30분 정도 소요되는데 , 초행길이라 서둘러 떠나야 하기 때문일까?
섬 이름이 주는 묘한 느낌 때문에 설레어서일까?
가로등도 없는 초행길, 그야말로 깜깜 절벽이라 자동차 라이트를 비추어도 길은 어둡고 낯설어서 조마조마 운전하는데, 남편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대서 신경이 곤두선다.
제발 운전할 때 옆에서 가만히 있어주면 좋으련만, 위험하니까 도와준다고 하는 한마디가 안 하니만 못하다.
아침 7시 배인데 선착장에 도착하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둘 뿐이어서 출항을 안 하면 어쩌나 했는데 예상 밖이다. 알고 보니 섬 학교로 출근하는 선생님들과 수협이나 기타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배로 출퇴근하는 것이었다.
사량도
옛 섬 이름은 박도였으나, 상도와 하도를 흐르는 물길이 가늘고 긴 뱀처럼 구불구불한 형세에서 유래하여 이 해협을 사량이라 하였다 하는데, 옥녀봉에 얽힌 비련의 실화에서 연유되어 사랑이 사량으로 변했다는 설과, 뱀이 많이 서식했다는 설, 섬의 형상이 뱀처럼 길게 생겨서 유래했다는 민간 어원설 등이 있다.
항상 섬에 내리면 어디부터 가야 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다. 지도를 보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지만 실제 상황은 다르게 전개될 때가 많기 때문에 처음 시작이 좋아야 순조롭다. 이래서 옛 말에 시작이 반이라 했나 보다.
관광 안내도를 보니 옥녀봉을 시작으로, 산 위에 있는 출렁다리를 거쳐 가마봉을 지나,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등산코스가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은 코스인 것 같다.
부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옥녀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안내판이 보였다.
깊옆 풀 섶에 차를 주차하곤 등산화와 장갑으로 무장하고, 가을이 내려앉은 산길을 들어서니, 단풍이 이름다워 쉽게 오를 것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지만, 옥녀봉의 슬픈 전설은 무거운 발거음을 옮기게 하였다.
슬픈 전설
옥녀봉 아래 작은 마을에 가난한 부부의 딸로 태어난 옥녀는 부모가 모두 죽고 난 후, 이웃에 살고 있는 홀아비가 옥녀를 데려다 키웠는데, 예쁜 처녀로 자란 옥녀의 모습을 본 의붓아버지는 딴마음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친아버 지로 알았던 옥녀는 눈길이 점점 이상해지는 의붓아버지의 행동을 눈치채고는 이 위기를 벗어날 묘책으로 " 아버지 간절한 부탁이 있습니다. 제가 하라는 대로 하시면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내일 새벽 상복을 입고, 멍석을 뒤집어쓴 채, 풀을 뜯는 시늉을 하면서 송아지 울음을 내며, 저 옥녀봉을 네발로 기어서 올라오시면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이튿날 새벽 옥녀봉에 올라앉아 설마 하며 바라보고 있는 옥녀는 상복을 입고 짐승의 모습을 한 아버지가 벼랑길을 기어오르는 모습을 본 순간,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못다 핀 열여섯 살 꽃봉오리가 산산이 부서졌다고 한다. 짐승보다 못한 의붓아버지의 기어오르는 모습을 보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옥녀의 기막힌 전설이 오르는 내내 지독히도 가슴을 찌른다. 가을비가 내린 후라 굉장히 미끄럽고 위험한 길을 오르니 옥녀봉이다. 옥녀가 앉아있었을 것 같은 바위에 앉아 잠시 마음을 정리하며 하늘을 본다. 그때나 지금처럼 가을 하늘은 파란 하늘이었겠지!
쉬는 것도 잠깐!
산 위에 출렁다리가 저기 먼 위쪽에서 손짓한다. 산꼭대기에 바위와 바위를 연결한 출렁다리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모습이다. 이제껏 다녔던 그 어느 섬보다 위험하고, 가파라서, 발 한번 삐끗하면 추락할듯한 아찔한 곳을 지나, 90도 에 가까운 깎아지른 절벽을 올라가는 철계단을 만났다.
"위는 보지 말고 밟고 있는 철계단만 보고 올라와! 평소에 겁이 많은 남편이 느닷없이 용감해지며 난간을 붙들고 올라간다. 무서움과 아슬아슬한 스릴을 동시에 느끼며 다 올랐다. 아! 이 쾌감! 잠시 만끽하니 이번엔 자일을 붙잡고 올라가야 하는 바위벽이다. 완전히 극기훈련과 산악훈련을 종합해 놓은 코스 같다.
이번에 남편보다 내가 먼저 용감하게 자일에 매달려 바위를 발로 차는 듯이 밟으며 올라갔다. 이 나이에 자일을 잡고 바위벽을 기어오르니 무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마음먹기에 달렸다. 포기하면 더 많은 경험들을 놓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느덧 출렁다리가 보인다. 두 개나?
아휴! 산꼭대기의 출렁다리는 바다 위 출렁다리보다 훨씬 더 무섭다. 모든 것이 내려다 보이는 산꼭대기 바위 위에 세워져 있는 출렁다리는 상상해본 적도 없지만, 다리를 건너려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너무 무서워 사진도 못 찍겠다. 남편도 무서운 듯 선뜻 건너지 못하고 주저주저한다.
어느새 우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건너가긴 해야 하겠고, 건너자니 무섭고,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한발 한발 디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진도 찍어본다. 덜덜 떨면서.....
가마봉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출렁다리 2개를 무서움에 빠져서도 용케 건너오곤 힘이 빠져버린 내 다리를 지탱하지 못해 주저앉아 버렸다.
위험한 길을 앞서며 내려오는 남편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아내를 안전하게 리더해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앞서가며 , 위험을 무릅쓰고, 땀으로 목욕하듯 했어도 괜찮다고 해가며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으니, 새삼 남편의 흰머리가 더욱 희게 보인다.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든 우리가 가을의 단풍길에서, 옥녀봉의 옥녀의 혼에게라도 홀린 듯 무섭고도 힘든 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내려오니, 아뿔싸! 내 장갑! 언제 떨어뜨렸는지 내손은 빈 손....
평생에 잊지 못할 경치와 경험을 하면서, 어쩜 이리도 우리네 인생과 같은지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섬 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