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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성토끼 Jun 24. 2023

뜨거운 어느 날

아침부터 햇살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는 무더운 하루가 될 것만 같다.

6월 중순이 지났으니 여름이 맞긴 하지만, 이 날씨는 7,8월에 준하는 날씨이다.

하긴 지구는 진즉부터 몸살을 앓고 있었으니, 이 갑작스러운 무더위도 별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저 그런 하루에 불과할 뿐이다.


딸깍.

영주는 커피 캔 뚜껑을 따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목으로 흘려 넣었다.

꿀꺽.

차가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다시 캔을 집으려다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딸그락.

캔이 빙그르 회전을 하며 커피가 바닥으로 뿜어져 나왔다.

영주는 바닥에 흘린 커피를 멍하니 바라보다 물티슈로 천천히 닦아내었다.


요즘 영주는 극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다.

언제부터인지 보이지 않는 캄캄한 벽안에 자신이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왜 이러는 걸까,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딱히 무슨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늘 해 오던 대로 그저 순탄한 일상이 흘러가고 있는 그런 상태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갑자기 이유 모를 슬픔이 차 올라오는 것이었다.

명상을 해도, 운동을 해도, 책을 열심히 읽어도 도무지 이 이름 모를 감정은 사라지기는커녕 영주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 sashafreemind, 출처 Unsplash


늘 보던 자기 계발 영상도 시큰둥하고, 큰맘 먹고 떠난 여행에서 보는 풍경도 별다른 감흥이 없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저 그랬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주위의 모든 것들이 빛을 잃은 그런 느낌이었다.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누워있는 것도, 어딘가를 가는 것도 싫었다.


영주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글이글 뜨거운 거리로 작은 양산을 쓰고 뛰쳐나갔다.

거리는 한산했다. 연한 하늘에는 하늘만큼이나 흐리멍덩한 구름들이 잔뜩 널려 있었다.

자신만큼이나 하늘도, 구름도 빛을 잃고 있다고 영주는 생각했다.

주위에는 온통 똑같이 생긴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다.

가끔 저 아파트들을 볼 때마다 왜인지 영주는 숨이 막혀온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둘러봐도 온통 사각형의 똑같은 건물들이 솟아있다.

이 더운 날 한 아기 엄마가 유모차를 끌고 어딘가를 열심히 걷고 있다.

그저 발길 따라 그 유모차를 따라 걷던 영주는 갑자기 발을 멈췄다.

여기가 어디지? 아파트 벽면을 보는데, 하필 아파트 이름조차 쓰여있지를 않았다.

길을 잃었다. 온통 똑같은 아파트 숲들 사이에서....

모두 같아 보이는 저 창너머에는 저마다의 삶들이 저마다의 형태로 펼쳐져 있을 것이다.


갑자기 발밑에서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덮쳐 온다.


© zyteng, 출처 Unsplash


뜨거운 햇살을 피해 양산을 썼지만,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어찌 피할 수 있을까?

참았던 땀구멍이 드디어 열렸는지 송골송골 땀이 솟아오른다.

아마 지금쯤 얼굴은 벌게져 있으리라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정신을 챙기고 영주는 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파트를 벗어나 차도 쪽으로 나왔다.

뜨겁게 작열하는 햇빛 아래 사람들이 드문드문 걸어 다닌다.

쭉 뻗은 차도를 따라 이 시간에도 차들은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상가 건물을 보면서 어딘지 대충 감을 잡은 영주는, 작은 카페를 발견하고 반갑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기다리는 동안 무심하게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를 바라다본다.


© kaffeemeister, 출처 Unsplash


가끔 아니 종종 영주는 삶의 한가운데를 벗어나 있는 느낌을 받는다.

눈앞에 보이는 이 모습들이 그저 영화의 한 장면인 듯, 아님 책 속 어느 문장들인 듯, 자신과는 무관한 어떤 다른 세상 속의 모습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삶의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사는 게 아니라, 삶을 겉돌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종종 든다.

자신조차 내가 아닌 제삼자로 느껴질 때도 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차가우면서 씁쓸한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영주는 찬찬히 길을 살펴본다.


따가운 햇살에 길가의 가로수마저 왠지 잎을 떨구고 늘어져 보인다.

사거리 교차로 한편에서 굴삭기가 단단한 아스팔트를 깨고 황토색 흙을 퍼올리고 있다.

단단해 보이는 흰색 안전모를 쓰고 형광색 조끼를 입은 남자가 깃발을 펄럭이며 차량을 유도하고 있다.


영주는 초록색 신호등 아래 드디어 결심이라도 한 듯, 이글대는 햇빛 속으로 작은 양산 하나에 의지한 채 차가운 커피를 들고 걸어간다.

어디로 무엇 때문인지 방향도, 목적도 모를 길을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는다.

발 밑에서는 작은 개미들이 어디론가 분주하게 줄지어 가고 있다.


흐리멍덩한 연한 하늘에서 내리쬐는 태양은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한줄기 위로처럼 바람이 살랑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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