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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원짜리 꽃바지의 행복

제주_세화오일장

by 여름의푸른색


화려한 조명 대신 꽃무늬가 나를 감싼다




쏴-

시원한 빗소리가 들리는 아침이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비 때문인지 아이들이 이불에서 나올 생각이 안 한다. 그래도 가야지. 엄마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너희들의 등교란다.




오늘은 세화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다. 오일장 마니아인 남편이 아침부터 준비에 한창이다. 나는 새로 산 녹색 장화를 신고 비장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중산간도로를 달린다. 촉촉하다 못해 축축한 질감의 바닥이 눈으로도 느껴진다. 차창 밖으로 부딪히는 비를 가만히 바라본다. 빗방울이 맺혀 한참 동안 나와 눈 맞춤을 하더니 그럼 나는 이만~하며 또르르 아래로 흘러가버렸다. 귀엽다. 창가에 송골송골 맺혀있는 빗방울들이.






세화 오일장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우리를 유혹하는 분식의 향연, 응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산속에 살다 보니 가끔 만나는 분식 친구들이 너무 반갑다. 오늘은 오징어튀김이다. 장마라서 거세게 내리는 빗소리와 튀김이 튀겨지는 소리의 대결에서 가뿐하게 튀김이 이겨버렸다. 오늘은 튀김 승! 아무리 먹어봐도 튀김의 완승이다.






아침부터 거하게 한상을 끝내고 오일장을 둘러본다.

둘째가 좋아하는 사과 첫째가 좋아하는 옥수수와 자두 남편이 좋아하는 감자까지 소쿠리에 담겨 정감 있는 재료들을 검은 봉지에 담았다. 소쿠리도 봉지도 오랜만이라 반갑다.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꽃바지. 오늘의 쇼핑 목록에 있던 제주스러운 바지다. 편하게 입기도 좋고 농사일을 할 때도 좋다며 사장님은 몇 개 살 거냐고 물어보셨지만 일단 하나만 사기로 한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강렬한 꽃무늬가 서로 내가 제일 센 무늬라며 서로 어깨를 밀치며 싸우고 있다. 싸움에서 승리한 핑크색 꽃무늬, 이 친구는 오늘 우리와 함께 집으로 가기로 했다.


분홍! 언제 입고 마지막이 된 건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 그 분홍. 분홍 꽃바지를 샀다. 5000원의 소비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5000원이라는 돈으로 바지 하나를 살 수 있다니. 요즘 물가에 비하면 소박한 바지값이다. 그래도 부들부들 시원한 소재의 바지를 담은 검은 봉지를 든 나의 마음은 즐겁다. 봉지를 흔들며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간다.



작업실에 딱 어울리는 작업복



좋은 것과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하던 서울에서의 삶에서 한 걸음 떨어져 살고 있다.

나의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마음도 한결 편안해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소유와 보상심리 그 어디쯤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작은 뗏목 하나에 몸을 맡긴 채 이대로 물 위에 떠 있어 보기로 했다.


그래도 별일 안 생길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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