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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푼젤이 아파요

식물 살인마의 손에서 살아남은 잡초 같은 너

by 여름의푸른색



제주 작업실에서 적응중인 라푼젤




식물 살인마를 아시나요?

제가 바로 그 식물 살인마입니다.

그런데 또 식물을 좋아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그래서 죽이고 또 사고 죽이고 또 사는 행위를 계속해서 하고 있어요. 쓰고 보니 무섭네요.

오늘은 라푼젤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네요.

저랑 같이 들어주세요.




제 이름은 라푼젤입니다. 나이는 5살이고요. 어떤 여자가 인터넷으로 저를 구입했어요. 저는 제 친구랑 같이 박스에 담겨 배송이 되었는데 그 친구 흙에는 작은 벌레들이 많아 그대로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답니다. 안타깝죠?



짧은 머리였던 라푼젤 아기시절



저는 예쁜 바구니에 담겨 주방 수전 근처에 매달려 있었어요. 어떤 여자가 다가오더니 저에게 미소를 보내며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자리를 바꾸더라고요. 어지러웠어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왔는지 여기저기 정리되지 않은 짐들이 그대로 쌓여있는 게 보였어요.




예쁜 주방, 생기 있는 주방을 만들고 싶었나 봐요. 재료를 다듬고 음식을 하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저를 계속 쳐다보더라고요. 특히 무심히 지나다가 수전에서 물을 받아 양손으로 대충 슥- 물을 주고 지나가요. 갈증이 났었는데 시원한 물을 마시니 살 것 같아요.




여자의 친구들이 집에 오는 날이면 하나같이 제가 이쁘다고 칭찬을 했어요. 만져보기도 하고 물을 얼마나 자주 마시는지 물어보기도 하더라고요. 여자는 인터넷 사이트를 알려주는지 휴대폰 액정을 보며 카톡으로 공유했다고 말했어요. 친구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저도 싫지는 않더라고요.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저의 위치가 바뀌었어요. 예쁜 책장이 생겼거든요. 책장 근처의 작은 못에다가 저를 걸어주었어요. 여자는 책을 좋아하는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전면책장에 진열하기 시작하더라고요. 진지하지만 재밌는 모습이었어요.




장발 라푼젤



이 집에는 자매가 살고 있어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이 책장 앞에 앉아 그대로 책을 읽어요. 라푼젤 잘 있었어? 인사를 건네면서 말이죠. 아까 그 여자가 정성스레 책을 진열했던 이유를 알겠어요. 아이들 때문인 거예요. 아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주방에서는 뚝딱뚝딱 소리가 나더니 여자는 아이들에게 과일과 간식을 무심하게 건네고 자기 책을 읽으러 가더라고요. 맨날 침대에서만 읽더라고요 침대에서 읽으면 책이 더 잘 읽어지나?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느덧 4년이 지났어요. 주방에서 가족회의를 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제주? 어딘지 모르지만 그곳으로 간다고 했어요. 아이들은 구피를 꼭 데려가야 한다며 울먹거렸어요.

여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어요.




라푼젤은 어쩌지, 가져갈까?

그래도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식물인데..


어머, 내 이야기를 하고 있나 봐요!

갑자기 남자가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어요


라푼젤은 가져가야지!


아이들도 여자에게 조르기 시작했어요.

엄마 라푼젤도 데려가자~응?




여자는 고민에 빠졌어요. 하지만 나는 알아요. 저 여자가 나를 얼마나 예뻐하고 아끼는지를.


그래야지! 라푼젤은 데려가야지.

근데 줄기가 엄청 약한데 괜찮을까?

여자가 걱정하고 있는 게 느껴졌어요.




그렇게 배를 타고 제주에 왔어요. 1박 2일이 걸렸지만 무사히 도착했어요. 여자는 또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며 나를 어지럽게 하고 있어요.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장소를 찾았는지 저에게 물을 흠뻑 주었어요.


피곤했나 봐요. 몸이 아팠어요. 여기는 습기도 많아 숨을 쉬기가 어려워요. 자꾸 힘이 빠지더니 잎이 노랗게 변했어요.

여자가 걱정을 하네요. 내가 아파서 그런가 봐요.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새로운 집에서 내가 놓여있는 공간은 여자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에요. 책과 음악이 있고 창밖으로 새소리가 들리는 창가 자리예요. 글을 쓰다가 나에게 아프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네요. 날씨에 빨리 적응을 해서 예쁜 잎을 보여줘야겠어요.




나는 머리가 긴 라푼젤이에요.

내 머리가 길어지면 여자는 가위를 가지고 와

예쁘게 머리를 다듬어 주거든요.

저는 그 손길이 닿는 게 좋아요.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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