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이 두 글자가 주는 힘이 있다.분명히
현생의 못다 한 꿈을 위해 오늘도 숨 가쁘게 달리고 있는 나는 오늘도 여유가 없다.
눈을 뜬다. 용수철처럼 튕겨 나 침대를 벗어난다. 아이들의 아침을 준비하고 도시락, 물통, 수저를 챙긴다.
빛의 속도로 하나씩 해결한다. 그러고는 헤이 카카오를 부른다.
"헤이 카카오 오늘 날씨 알려줘~"
AI 스피커는 나의 손가락 운동을 대신해서 바쁜 아침 시간을 도와준다. 감성적인 여자 목소리가 오늘의 날씨를 알려주면 그날의 날씨에 맞춰 아이들의 옷을 준비한다.
긴팔, 칠부, 반팔, 얇은 잠바, 조끼, 조금 더 두꺼운 잠바, 패딩.
날씨에 맞춰 아이들의 옷을 준비한다. 숙제와 준비물, 유치원과 학교의 모든 알림과 상황 체크를 끝내고 나면 아이들이 각자의 본분을 다하러 출발한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좋은 하루 보내."
드디어 갔다.
정신없던 등교 전쟁이 드디어 끝났다.
나는 이미 방전이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아무 생각 없이 한곳을 응시한다. 아침부터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고 전쟁을 치렀다. 아이들이 떠난 흔적쯤은 모른체하고 지갑과 휴대폰 그리고 책을 가지고 냅다 스타벅스로 달려간다. 오전 시간에 문을 연 카페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게다가 그 수고스러움도 견딜 자신이 없다. 나의 배터리는 이미 깜빡거리고 있다. 꺼지기 일보 직전이다.
누가 시켰나? 그건 아니다.
누가 그렇게 예민하게 날씨와 온도까지 체크하며 피곤하게 살라고 했나? 그 또한 아니다.
그렇다면 왜?
왜? 그렇게 살고 있는 건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임신과 육아를 겪어오며 나는 나를 버렸고 아니 죽였고 그 자리에 엄마라는 인형을 떡하니 세워두었다.
꽤 그럴싸한데? 스스로도 만족하고 살았다.
엄마 인형은 맡은 바 열심을 다했을 뿐이다. 그런데 자꾸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린다.
깜빡이는 신호를 알아차린다. 이제 지쳤다는 뜻이다.
묵직한 큰 문을 힘껏 밀고 스타벅스에 들어선다. 그러자 문틈 사이로 커피 향이 새어 나온다. 커피향 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된다. 신선한 커피향은 코끝을 간지럽힌다. 그다음 나의 몸을 감싸고 이내 사라진다. 마법이라도 부린 걸까. 엄마 인형은 사라지고 잠시 휴식시간이다.
드디어 여유를 찾은 것이다.
겨우 나로 돌아왔다.
나의 몫을 오늘도 해치웠다는 안도감과 말 못 할 체력의 한계가 고스란히 숨에 묻어난다.
휴~
커피가 있지만 커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숨 돌릴 틈 없이 많은 일을 처리했더니 아무런 욕구가 남아있지 않은 탓이다.
왜 좋아하는 커피를 두고도 마시지를 못하니 바보같이!
괜히 혼잣말을 해본다.
휴대폰 액정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뉴스를 뒤적인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아이들은 아스라이 멀어져 간다.
'잠시 off' 엄마 인형은 스스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꾸욱-
휴대폰 액정이 까맣게 변해가듯 엄마 인형도 힘없이 축 늘어진다. 오전 업무 후 쉬는 시간이다. 충전기를 꽂아 배터리를 가득 채운다. 그래야 오후에 또 쓸 수 있으니깐.
이윽고 나로 돌아온 몸과 마음이 동기화된다. 그제야 커피잔에 손이 간다.
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쪼옥 쪼옥
절반의 커피가 사라지고 나서야 정신이 든다. 커피가 온몸을 타고 흐르는 이 느낌을 온전히 즐기고 싶다.
붉은 피 대신 검은 커피가 몸속을 이리저리 휘젓는 이 느낌이 좋다.
분명 살고 있다. 숨 쉬고 있다. 아이도 잘 키우고 있다. 남편과 사이도 좋다.
근데 헛헛하다. 내가 없으니깐.
매일 없는 에너지를 쥐어짜서 쓰는 똑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그래서 더 남는 게 없다. 나를 위해 쓸 에너지는 조금이라도 남겨두고 싶은데, 그런데 없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새벽 5시로 기상시간을 바꾸기로 했다. 그럼 나에게는 5시~7시까지 두 시간의 여유가 생긴다. 물론 6시가 넘으면 아이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1시간의 여유가 있다.
눈을 번쩍 뜨고, 살금살금 걸어 나와 방문을 닫는다. 욕실로 와 세안을 한다. 로션까지 찹찹 바르고 거울을 본 뒤 나만의 여유를 맞이하러 간다. 욕실에서 다시 거실로 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흡사 도둑고양이 같다.
커피 머신 앞에 서서 내려오는 커피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신다. 고요한 새벽의 커피는 행복 그 자체다.
미리 선곡해 둔 유튜브 채널을 스피커에 연결한다. 잔잔한 재즈를 틀고 책을 펼쳤다. 조용히 읽어 내려가는 활자 속에서 의미를 찾아본다. 뭐, 대단한 의미를 찾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니깐.
이렇게 여유를 가진 날이면 나는 조금 더 나다운 사람이 된다. 투명하게 잃어가던 나를 겨우 불투명하게 붙잡아 묶어두고 이내 웃는다. 여유로운 시간이 주는 선물이다.
내가 가진 색채를 모두 되찾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하얀 빈틈없이 채워진 나를 만나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없이 여유로운 그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