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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푸른색 Jul 26. 2023

티브이 없이 5년째



시작은 고장이었다. 이사와 함께 고장 난 티브이를 버리고 다시 구입하기까지 약간의 텀이 생겼다. 티브이 없는 삶을 상상해 본 적 없었는데 티브이 없이 살아도 살아졌다. 경험은 다른 상황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동시에 다른 환경이 만들어졌다. 무료한 공간을 채우던 친구의 목소리 같던 티브이는 그렇게 사라졌다.




빈 공간에 소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거실에도 방에도 더 이상 티브이의 재잘거림이 빠진 상태는 마치 진공상태 같은 먹먹함을 가져다주었다. 비어 있는 소리에 적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동시에 빠르게 대체품을 찾아냈다. 라디오와 아이들의 영어 CD 그리고 책. 무료해지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아이들은 책과 더 가까워졌다. 가끔 유튜브를 외치기는 하지만 주말에만 잠깐씩 시간을 정해서 보여주거나 아침 시간에 영어 노출을 위해서 틀어주는 정도였다. 첫째보다 둘째의 반발이 컸다. 첫째는 영어 노출 4년 차지만 둘째는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고 게다가 언니가 보는 내용들은 아직은 어렵게만 느껴져서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렵사리 멀어진 미디어와 다시 친구가 될 수는 없다. 무분별한 내용들과 단어들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흡수되고 그것을 사용하는 아이들. 할 수 있는 만큼 무해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티브이가 없으므로 가족들의 대화는 더 늘어났고 아이들은 점차 적응하기 시작했다. 유튜브를 틀어 달라고 조르던 둘째도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아이들이 책을 가까이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 집에 놀러 오는 가족들과 친구들은 티브이가 없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부모님들은 티브이가 없어서 자고 갈 수 없겠다며 웃으시지만 아이들이 책을 가까이하는 모습을 직접 보시고는 티브이 없이 지내기를 잘했다며 수긍해 주신다.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일부러 티브이를 없애거나 아이들을 제한하거나 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이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고 이제는 모두가 조용한 환경에 익숙해져 버렸다. 단점도 있다. 큰 소리에 깜짝 놀라거나 너무 많은 소리에 노출되는 환경에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다.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설치는 것도 작은 소음에 반응하게 된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그래도 얻은 것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의 취미인 영화 감상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희생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당시 유행하던 LG 스탠바이미를 질러버렸다. 이후로는 원하는 영상만 선택적으로 보여주거나 나의 휴대폰으로 연결된 영상만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잠들고 난 후 남편의 영화시간도 지켜줄 수 있게 되었다.



소리가 사라진 공간에서는 낮은 재즈가 흘러나온다. 적당히 책을 읽기 편안한 템포의 음악과 몰입하기 쉬운 환경만을 세팅해 두고 각자의 할 일을 하게 되었다. 카페 같은 분위기가 완성되고 능률도 올랐다.


더하기보다 빼기는 더 힘들다. 특히 가전의 경우에는 부피가 크고 금액도 커서 그냥 방치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학년의 자녀와 함께 있다면 한 번쯤은 시도해 볼 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티브이를 틀어주면 나도 편하다. 엄마를 찾지 않고 아이들끼리 신나게 티브이를 보는 시간이 가끔은 그립기도 하다. 그래도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평생을 책과 친구로 지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아직까지 티브이 구매를 망설이게 한다.


대신 할머니 댁에 가면 티브이 앞에 붙박이처럼 앉아있는 아이들을 보게 된다. 부작용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엄마인 내가 봐도 너무 재미있는 티브이, 조금만 더 천천히 가까워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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