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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푸른색 Aug 09. 2023

초단편 끄적이기

이곳은 '고요'북카페입니다.



쨍그랑. 유리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침묵을 깬다. 유리 사이로 넘쳐흘러내리는 맥주는 탁자를 타고 내려 이내 끈적한 진흙처럼 변해갔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낮은 조도 사이로 비치는 그림자만이 속삭이는 이곳은 제주의 평대리의 한 북카페.

이곳에서는 대화를 하지 않는다. 주문은 오직 키오스크로 한다. 필요한 요구는 메모를 통해 전달한다. 작은 창구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은밀한 속삭임 같다.


9시 9분. 디지털시계는 직관적으로 숫자를 내뿜는다.

키오스크의 메뉴를 보던 준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1인 1 메뉴 주문이 원칙인 이곳의  메뉴는 단 두 가지 맥주와 레몬 슬라이스가 올라간 진토닉뿐이다. 커피는 판매하지 않는다.




평대리 앞바다가 보이는 통창을 넘어 짙은 바다의 풍경이 고요하게 다가온다. 통창 앞에는 1인용 리클라이너와 작은 협탁이 있다. 협탁 위에는 개인 조명과 소품을 놓을 수 있는 약간의 자리만 있다. 낮게 흐르는 재즈는 소음처럼 들리지만 독서에 방해가 될 만큼의 크기는 아니다. 다만 너무 조용한 실내의 공기를 발목만큼만 띄워 책을 읽기 편안한 분위기로 만들 뿐이다.



준호는 오늘 제주에 왔다. 혼자 왔다. 원래 혼자였는지 커플이었는데 혼자 오게 된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 상태였다. 그 상태로 맥주 한 잔을 마시며 책장에서 꺼내온 책은 무릎 어디쯤에 올려 둔 채 창밖의 바다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등 뒤로 느껴지는 쓸쓸함과 슬픔이 안개처럼 공간을 매운다. 팔짱을 끼고 있던 한쪽 팔을 협탁으로 뻗어 맥주잔을 집어 든다. 맥주잔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기가 바지로 떨어지자 재빨리 툭툭 털어버리고는 다시 맥주를 입으로 가져가 마시기 시작했다. 살짝 어두운 조명 탓에 그의 표정이 일렁이는 물결 속의 얼굴처럼 흐릿하게만 보인다. 맥주를 마시며 책 표지를 앞뒤로 뒤집어 본다. 처음부터 책을 읽으려고 온 것은 아닌지 협탁 위에 책을 내려놓는다. 편안하게 기대어 바다의 한곳을 응시하는 그, 맥주의 목 넘김이 좋은지 꼴깍꼴깍 소리만이 공간에 가득하게 울려 퍼진다.






징-징-

고요의 공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휴대폰 진동소리가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 준호. 한숨을 깊이 내쉬고는 통화를 시작한다.

가만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던 준호의 미간이 일그러진다.


"그래.. 내가 죽일 놈이지."


더 이상 말을 잊지 않고 폴더폰을 탁 접어버린 후 협탁 위에 신경질적으로 던져버린다. 깨진 맥주잔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버렸다.


그가 남기고 간 감정만이 고요한 북카페에 덩그러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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