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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푸른색 Sep 24. 2023

가을 모기와 전기 파리채


02로 시작되는 번호다. 김포에서 제주로 오기 위해서 공항에서 수속을 막 마친 상태였다. 휴대전화 액정에 덩그러니 떠 있는 전화번호. 느낌이 싸했다. 나는 얼른 액정의 슬라이드를 옆으로 밀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여기 항공사 카운터인데요. 수화물 검사 요청이 있어서 다시 이쪽으로 와주세요."


수화물 검사? 가방에 뭐가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물건은 없었다. 간단한 옷과 책 그리고 어머님이 싸주신 반찬 몇 가지와 칫솔 같은 평범한 물건들만 담았다고 확신했다. 그래놓고도 은근히 떨리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 순찰을 하고 있는 경찰차만 봐도 괜스레 마음이 따끔거리는 알 수 없는 죄책감마저 들었다.




일단 하얀 철문을 밀고 들어갔다. 처음 와보는 곳이라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기계들이 가득했다. 캐리어가 움직이는 레일도 양쪽으로 있었다. 레일 위로 우리가 수화물로 붙인 짙은 회색의 큰 캐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네"

"혹시 전기 파리채 있나요? 좀 보여주세요."

"아... 네. 있어요."




전기 파리채였구나. 그렇다. 며칠 전 우연히 전기 파리채를 보고 요즘 가끔 출몰하는 집 근처 모기가 떠올랐다. 베란다 방충망에 붙어있던 새카만 색의 산 모기. 물렸다 하면 한 달은 고생하는 지독하게 가려운 그 산 모기가 눈앞에 스치듯이 지나갔다.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이건 사야 해!'

내가 갑자기 집어 든 전기 파리채를 보고 남편은 의아해하면서도 그냥 보고만 있었다. 전기 파리채는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회전이 되는 것 충전용과 건전지용, 하늘색과 핑크색 있었는데 나는 그중에서 '강력한!'이라고 쓰인 전기 파리채를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제법 기뻤다. 이제 아이들을 모기로부터 지켜낼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생겼다. 각종 벌레들이 나타나도 남편을 부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뿌듯함도 함께였다.




집으로 돌아와서 포장도 뜯지 않고 리어 제일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다. 그러고는 파손되지 않도록 옷가지로 켜켜이 보호막을 만들었다. 우리의 소중한 전기 파리채가 제주도까지 무사히 닿을 수 있도록 만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미션이었다.


인터넷에서도 언제든지 살 수 있지만 직접 보고 사고 싶었다. 그래야만 튼튼하고 전류가 강한 전기 파리채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굳이 왜 지금 충동적으로 샀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을 지키고 싶은 모성애라고 해두자. 가려움에 고통받고 쉽게 부어오르는 살성을 가진 아이들에게 모기 한 마리는 엄청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남편이 제일 큰 희생양이다.  AB형인 남편은 아이들과 함께 잠이 들면 아이들을 대신해서 모든 피를 모기에게 헌혈한다. 길을 가다가도 물리고 산책을 하다가도 혼자만 물리는 모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남자다. 남편의 피를 충분히 먹은 모기는 아이들에게 이동하여 2차로 식사를 즐긴다.


며칠 전이었다. 자는 동안에 모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아침에 눈을 떠 보니 이미 둘째의 몸 여기저기에 모기에 물린 자국이 가득했다. 약을 발라주면서도 모기가 있는지 하얀 벽지 이곳저곳을 매의 눈으로 째려봤지만 어디에도 모기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나? 하는 찰나, 둘째의 엉덩이 아래에 압사당한 모기 한 마리가 보였다. 마치 쥐포같이 변해버린 모기.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모기. 납작해진 모기 다리 하나를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살포시 들어 구피 어항으로 가져갔다. 모기에게는 미안하지만 구피들의 단백질 보충 시간이 되었다. 풍덩~어항 속으로 잔잔한 물결이 일자, 여기저기서 구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기야, 자업자득이야. 그러나 미안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선선한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밤이면 방충망에 붙어 있는 모기와의 아이 콘택트를 시작한다. 모기야 너는 절대로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없어! 강한 눈빛으로 제압하고는 창문을 쾅하고 닫는다. 촤라락 소리를 내며 빠르게 움직이는 하얀 커튼까지 치면 이제 완성이다. 잠자리에 든 아이들에게 노란색 간접 조명을 켜주고 좋아하는 오디오 동화를 틀어주었다. 오늘도 아이들은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모기 걱정이 없는 하루를 마무리한다.




나는 충전이 완료된 전기 파리채를 손 닿는 가장 가까운 머리맡에 두었다. 그러자 냉장고에 먹을 것을 가득 채워 둔 것처럼 나의 마음과 방 안을 채우는 공기의 밀도가 동시에 올라갔다. 방충망에 다닥다닥 붙은 모기가 가득했지만 우리의 밤은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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