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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의 카톡

by 여름의푸른색


장문의 카톡을 받았다. 나는 이 글을 나누어 읽었다. 읽기 힘든 마음이 나의 눈을 반만 뜨게 했고 아주 천천히 읽어 내려가게 만들었다.


카페에서 따뜻한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다시 카톡 창을 열었다. 겨우 두 줄 읽었을 뿐인데 또 눈동자 앞에 작은 파도가 일렁인다. (이놈의 특징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데 그 꾸준함과 성실함에 반할 뻔했다.) 파도가 넘치지 않게 한 호흡 꿀꺽 삼키고 커피를 받아들고 카페를 나섰다. 오늘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손에서 전해지는 커피의 온도가 딱 좋은 날이다.



길을 걷다 신호등 앞에 멈췄다. 다시 용기를 내어 두어줄 읽어본다. 글 안에서 액정을 뚫고 작은 담요가 신호등 앞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나의 어깨를 조용히 감싼다. 글이 주는 따스한 온도가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서 또 읽기 힘들었다. 아니면 천천히 아껴 읽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전달하기 위해 적당한 두께의 담요가 되도록 애쓰셨을 마음이 느껴졌다. 너무 두꺼워서 버겁거나 너무 얇아서 외롭지 않도록.




나는 하루 종일 장문의 카톡을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극세사의 포근함이 느껴졌다. 내가 좋아하는 질감의 글을 받았던 것이다. 촉감이 좋아서 자꾸 쓰다듬게 되는 어떤 것을 만난 기분이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눈으로 따라가며 읽었는데 마지막 줄까지 읽고 나니 나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 뼘 더 괜찮아지고 한 발 짝 더 걸어갈 용기가 생겼다.



차가웠던 모든 것은 사람의 온도로만 녹일 수 있다. 어떤 강력한 드라이기로도 아무리 뜨거운 불로도 녹일 수 없던 응집된 무언가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천천히 한 방울씩 녹아 똑똑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듯이 쉴 새 없이 똑똑똑 떨어진다. 이 소리가 싫지 않은 걸 보니 지금 제대로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두 작가님들의 카톡 메시지로 가슴속의 응어리가 한 방울씩 녹아내렸다. 슬픔의 이름을 빌려 살고 있는 내 안의 무언가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형태를 무너뜨리고 있다. 정성스럽게 보내주신 피드백을 보니 연극 대본에 나를 갈아 넣어 진짜 잘 써야겠다는 열망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오늘도 고마웠다는 말을 참 길게도 쓴다.





"과거의 슬픔은 시간이 얼마나 지나든 여전한 현재진행형의 아픔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글로 솔직하게, 담담하게 풀어내는 과정에서 그것은 반드시 다른 형태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상처는 밖으로 꺼냈다 다시 넣을 땐 반드시 그 모양이 변한다고. 아주 천-천히 조금씩 견딜 수 있는 모양으로 변해간다는 말이 생각났어요."



작가님이 보내주신 이 말의 뜻을 나는 완벽히 이해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슬픔의 터널을 통과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슬픔이라는 녀석의 모양도 질감도 무게도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오늘도 나는 이 슬픔을 버틸 수 있는 용기가 한 스푼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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