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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의푸른색 Oct 16. 2024

봉지 안에 든 사랑

     


         

‘지금 손을 잡을까?’    

      

병상에 누워 의식마저 희미해져가는 아빠를 바라본다. 그 순간 나는 갈등했다. 다 큰 딸이 다시 아빠의 손을 잡기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엇이 나를 망설이게 한 걸까. 아빠가 가진 인생의 모래시계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침대 가까이로 다가가 아빠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데 막상 손을 잡고 나니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걸까. 왜 이제서야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걸까.



               

우리는 무뚝뚝한 부녀였다. 경상도 남자와 그의 딸은 가까운 듯 보였지만 표현이 서툴렀다. 아빠 역시 “밥은? 아는(아이들은)? 자자!” 세 마디로 압축시킬 수 있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아빠는 평소에 표현하지 못하는 말들을 해야 할 때, 술의 힘을 빌렸다. 적당히 기분이 좋아진 아빠는 엄마에게 곧잘 사랑을 표현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경상도 남자가 하는 사랑은  수줍고도 뜨거웠다.

           



나에게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무한한 지지와 사랑은 표현하는 사람. 아빠는 때때로  툴툴거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아빠가 가끔 부끄러운 사랑을 서툴게 표현한다는 걸 아니까. 아빠가 과일을 사 올 때도 그랬다. 어릴 때부터 햇 과일을 좋아했던 나는 과일가게에 새로운 과일이 등장하자마자 먹고 싶은 꼬마아이였다. 갓 나온 과일은 당도는 떨어지고 비싸기만 했다. 하지만 그 과일의 첫 한입을 베어먹었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아빠랑 같이 과일을 사러 가면 아빠는 내게 꼭 한 마디 했다.

         

“가시나, 비싼 것만 좋아하고!”    

      

아빠는 말투와는 다르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잊지 않고 과일을 사 오셨다. 그건 부끄러움이 많은 아빠가 하는 나름의 애정표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아빠의 투박한 문장 속에는 딸을 향한 사랑이 담뿍 담겨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하는 아빠의 말속에서 찐한 부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과일이 가장 비쌀 때 딸을 위에 기꺼이 지갑을 열었을 아빠의 손.         




그런 아빠가 병실에 누워있다.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모든 수치가 보여주고 있었다. 산소호흡기에서는 거센 바람 소리가 났고 꺼져가는 아빠의 숨소리가 병실 안을 공허하게 울렸다.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내쉬는 아빠. 하지만 나는 아빠 옆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시집간 딸이 아빠 손을 잡을 일이 얼마나 있을까.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 아빠에게 팔짱을 낀 적이 있지만 이마저도 10여 년 전 일이다. 내가 주저하고 있는 순간에도 아빠의 시계는 빠르게 흘러갔다. 동시에 내 머릿속은 철 수세미처럼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시간이 없어.’          


아빠 몸에 치렁치렁 걸쳐진 호스들과 주변을 둘러싼 많은 기계들. 그리고 그 기계들이 뿜어내는 고약한 기분 나쁨이 한 데 섞여 동시에 나를 괴롭게 했다. 나는 용기를 내야 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바로 움직여야 했다. 아빠는 지금 나에게 다가올 수 없으니 내가 아빠 곁으로 가야만 했다. 한 발짝만 떼면 아빠가 있는데 그 한 걸음이 무겁고 두려웠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아빠 옆으로 다가갔다. 아빠의 손이 있는 곳에 멈춰셨다. 그리고 아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빠의 체온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아직 따뜻했다. 아빠는 내가 지금 당신의 손을 잡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아빠는 나의 손을 잡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퉁퉁 부은 아빠의 손을 주무르며 조금 더 일찍 아빠의 손을 잡지 못했던 나를 원망했다. 고작 한 발짝 떨어진 거리였는데 무엇이 우리 부녀를 가로막고 있었을까. 그때 나는 뭐가 부끄러웠던 걸까. 다 큰 딸이라는 알량한 생각 때문에 아까운 시간만 흘려보낸 건 아니었을까.



          

복숭아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마트에서 복숭아 상자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보고 살까 말까 망설여졌다. 과일을 보니 문득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는 내게 과일을 사주면서 망설인 순간이 있었을까. 아니, 없었을거다. 아빠는 내가 과일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표정, 맛있게 과일을 먹는 나의  입, 행복한 딸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비싼 과일이라도 기꺼이 사 오셨을 아빠.




기억 어딘가에서 현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빠가 보인다. 아빠 손에는 과일 봉지가 들려있다. 봉지  안에는 과일이 아닌 아빠의 사랑이 담겨 있다. 딸을 위해 과일가게를 서성였을 아빠. 가장 좋은 것을 골랐을 아빠. 과일 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기분 좋은 발걸음을 재촉했을 아빠.


그리고 나에게 무심하게 건네는 과일 봉지.

          

“자, 이거”  

        

아빠는 과일 봉지만 툭 전해주고 방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을 옮기는 아빠의 뒤통수에도 함박웃음이 비친다는 걸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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