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가능하다고?
겨우 한 두 살 터울인 우리 네 자매를 엄마는 안고 업고 젖을 먹이며 키우셨다. 막내 외삼촌은 아이를 업고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져 제대로 쉬지 못하는 누나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엄마가 그렇게 너희들을 힘들게 키웠다는 것을 알아달라는 마음에서 말씀하셨겠지만 그 당시 나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내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엄마가 홀로 분투하며 아이를 키우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외삼촌에게 왜 그렇게 그러한 기억이 남아 우리들에게 전해졌는지도 말이다.
'너도 자식 한번 낳아봐라!'
옛말은 틀린 것이 없다는 게 맞는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그제야 부모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된다. 그리고 부모 또한 나처럼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는 인간일 뿐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엄마의 인생을 가까이 보고 아는 나는 어린 시절의 관점이 아닌 새로운 관점으로 엄마를 바라보게 되었다. 엄마도 연약한 여자일 뿐이었음을...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관점을 가졌다는 의미는 나 또한 여러 차례 인생의 굴곡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엄마는 ‘아기를 이렇게 춥게 해 놨어?" 하며 이불로 아기를 꽁꽁 싸매셨다. 그 때문에 다음날 아기에게 태열이 생겼다. 우리가 아기였을 때도 엄마가 이렇게 우리를 싸매셨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은 웃음이 나왔다. 지금의 나의 아이에게 하듯 따뜻한 옷을 입히고 이불로 꽁꽁 싸매어 엉덩이를 ‘토닥토닥’ 하는 엄마가 상상되었다. 없는 살림에 고만고만한 아이들, 아프기도 많이 아팠고 사고도 많이 쳤다. 특히 둘째인 내가 말이다.
우리 자매들은 엄마를 닮아서 강하다고 생각한다. 각자 어려운 시련들을 이겨냈고 현재 착실히 살아가고 있다. 아마도 엄마가 걸어간 길을 우리라고 못 걸어갈 것 같으냐! 하는 인생에게 대드는 마음일 것이다. 자식농사에서 엄마가 우리에서 가장 미안해하고 마음 아파하시는 부분은 교육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었다면 우리들을 좀 더 잘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며 엄마는 눈물을 글썽이셨다. 단언컨대, 그 당시 엄마는 엄마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고 최선의 결과를 이뤄내셨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들 중 어느 하나 삐뚤어지지 않고 장성하게 된 것은 다 엄마의 덕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정말 아주 많이 감사하다고 전해드리고 싶다.
"엄마 괜찮아! 엄마 잘했어! 내가 엄마 자식이라는 게 자랑스러워!"
쭈쭈
처음 아이를 낳고 젖을 물렸을 때 기억이 난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조그마한 생명체가 갑자기 나의 젖을 빨아 대는 느낌은 '이게 뭐지?'싶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에 아이에게 물린 나의 젖꼭지는 피가 나서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종종 큰아이에게 처음 젖 물린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때 네가 얼마나 세게 빨았으면 5초 정도 빨았는데 나중에 보니깐 피딱지가 앉아 있더라.' 그런데 아무리 상처가 나도 아이에게 젖을 계속 물리다 보면 어느새 젖은 아물었다. 아기는 젖을 빨 때 있는 힘을 다한다. 마치 이것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작은 몸에 꼼지락대며 열심히 빨아댄다. 젖을 빠느라 숨이 찬 건지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난다. 나에겐 그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한번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엄마에게 확인시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그런 아기를 바라보면서 엄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나의 아이처럼 쌕쌕거리며 엄마 젖을 빨아 댔었을까?
어렸을 때 아마도 내가 세네 살 때 기억이다. 엄마는 동생에게 젖을 주고 있었고 나는 그 젖 한번 먹겠다고 어마에게 졸랐던 기억이 있다. 엄마의 젖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간식 같은 거였던 것 같다. 아주 어릴 때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맛 자체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맛이 기억이 남지 않을 정도로 내가 어렸거나 아니면 젖이란 것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자극적이 않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가지 기억은 막내가 간식으로 요구르트를 다 먹고 나면 엄마는 막내의 빈 요구르트 병에 젖을 리필해 주셨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와 부럽다! 나도 먹고 싶은데...’
이제는 엄마가 옷을 갈아입거나 샤워하고 나올 때 내가 그렇게 좋다고 물고 빨던 엄마의 젖꼭지를 가끔 볼 수 있는데, 저 작은 젖꼭지로 딸 넷을 길렀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엄마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가 저걸 쭉쭉 빨아먹었다고! 말도 안 돼”
그럼 엄마는 젖을 빠는 시늉을 하며 말한다.
“그럼 네가 뭐 먹고 컸겠냐? 엄마 젖 먹고 컸지! 이렇게 막 좋다고 먹던데!”
그러다 언니가 가세하면
“네가 제일 좋아했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된다. 시골 나의 고향집은 나이 든 엄마와 또 같이 나이 들어가는 딸들의 재잘거림으로 가득하다. 엄마의 젖을 물고 빨며 성장한 우리들은 엄마의 곁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엄마에게 돌아온다. 어깨에는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과 함께 말이다.
엄마는 삶에 짓눌린 이런 나의 심정을 아셨을까? 금세 따뜻한 밥 한상을 푸짐하게 차려내신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가 먹는 동안 밥상 앞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나는 금방 밥 한 공기를 뚝딱한다. 그제야 나는 살 것 같은 기분이 난다. 잠시 동안이지만 엄마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인생의 짐을 내려놓는다. 엄마의 집을 떠나는 동시에 어깨의 짐은 다시 원상 복귀되지만 한 번 더 살아갈 힘이 난다. 괜찮아질 거라는 용기도 생긴다. 고향의 어디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나는 '익산'이에요!라고 답한다. 사실 나의 고향은 전북 익산시가 아니다. 나의 고향은 엄마의 품이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생명을 나누어준 '엄마'가 나의 진정한 고향이다. 만약 엄마가 그곳에 없다면 아마도 그곳은 나에게 무의미한 공간일 뿐 단지 엄마의 흔적을 찾는 장소로만 남을 뿐이다. 그러니 엄마, 나의 고향이여! 부디 내 곁에 오래오래 있어줘!
좌약은 싫어
안 아프고 크는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나도 감기에 걸리거나 이유 없는 열이 곧잘 나기도 했었다. 열이 나는 경우에는 주로 아스피린을 자주 먹었다. 그 당시에는 타이레놀, 부루펜보다는 아스피린을 자주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염증에는 마이신이다. 그러고 보니 고약도 붙여봤었지. 여하튼 아스피린은 달콤하고 맛있었다. 마치 사탕을 먹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런데 어느 날 엄마는 어디서 그런 약을 구해왔는지! 전혀 색다른 형태의 약을 가져왔는데 그것은 바로 ‘좌약’이었다. 어린이 해열에 좋다고 소문난 약이라며 열이 나기만 하면 우리는 항문에 좌약을 찔러 넣었다. 어찌어찌 엄마와 실랑이를 끝에 어쩔 수 없이 엉덩이를 까고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좌약을 항문에 밀어 넣었다. 그 불쾌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정말 소름 끼치는 느낌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싫다.
'항문은 나가는 곳이고 들어오는 곳이 아니라고!'
한 번은 동생이 열이 떨어지지 않아 병원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다. 동생은 뇌수막염이 의심되어 허리에서 척 수액을 뽑는 요추천자 검사까지 했다고 한다. 울부짖는 동생을 보며 엄마와 할머니는 검사실 밖에서 딸을 살려달라며 하나님께 울며 기도 했다고 한다. 그 탓인지 막내는 목사님과 결혼했다. 다행히 동생은 뇌수막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엄마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막내가 아파서 인지 엄마는 많이 놀란 듯했다. 지금도 동생은 엄마의 최애의 딸이다. 나는 엄마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고... 엄마는 지금도 자식들이 아프면-이 아픔은 몸과 마음 둘 다 해당된다.- 가장 마음 아파하신다. 아마도 우리 모르게 눈물을 삼키셨을 때도 많으셨을 테지. 결혼한 뒤에는 사위가 볼까 봐 사돈어른이 볼까 봐 뒤에서 눈물을 훔치는 것은 슬프지만 친정엄마의 숙명인 것 같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미열이나 약한 배앓이면 엄마의 손으로 자연치유가 되었다. 어린 시절 열이 나는 것 같으면 쪼르르 밭에서 일하시는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나 열나!"
하면 엄마는 나의 이마에 손을 짚으셨고 그 후 엄마의 진단이 있었다.
“좀 열이 있네!”
“그렇지 열이 난다니깐...”
엄마의 진단은 마치 내가 인정받는 느낌이 들었고 엄마의 손을 통한 따스함으로 나의 몸은 치유되었던 같다. 그렇게 손을 이마에 짚는 행위만으로 쉽게 열이 가라앉았다. 약한 배앓이는 엄마손으로 쓱쓱 문질러주면 나았다. 지금의 내가 나의 아이들에게 하듯 배를 만져 줄 때처럼 '엄마손은 약손! OO 배는 똥배!'라는 노래를 불러주어야 만한다. 안 그러면 효과가 없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엄마의 손은 만능이었다. 물론 음식도 잘 만드셨지만 나에게 안성맞춤의 '등 긁개'가 되어주었다. 어릴 적 나는 가려움증으로 힘들었는데. 엄마는 굳이 손톱을 세우지 않고 농사일로 거칠어진 손바닥으로 쓱쓱 문대듯 긁어 주면 정말 시원했다. 어렸을 때는 왜 그리도 넘어지는지 늘 무릎에는 딱지가 사라지지 않았었다. 그렇게 생채기가 생기면 쑥을 으깨어 싸매어 주었다. 쑥을 손으로 비벼 으껴면 진한 쑥향이 났었다. 그 으깬 것을 상처 난 곳에 붙이면 어느새 아픔도 울음도 잦아들었다. 그러곤 바로 뛰어놀았다.
엄마 난 아직도 머리가 아픈 것 같아! 현실에 치이고 사람에 치여,
엄마가 머리만 짚어주면 다 나을 것만 같던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없겠지.
나도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엄마가 그랬듯 따스함을 전해주고 싶어!
엄마란 그런 거니까!
털실 조끼
엄마가 이걸 언제 만드셨는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직접 만든 털실 조끼를 자주 입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조끼에 코르덴바지를-우리 집은 '고래 똥'바지라고 했었다- 입었었다. 보라색, 초록색, 빨간색의 조끼를 입고 있는 우리 자매가 기억이 난다. 옆동네 삼거리 이발소에서 나란히 자른 바가지 머리였다. 아마도 그 시절 처녀들은 결혼하기 전 아이들 옷을 미리 준비했던 것 같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화장품 박스에 엄마가 만든 코바늘 뜨기 작품이 열대여섯 개 정도 있었다.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그것은 없어져버렸다. 이제 엄마는 코바늘 뜨기 하는 법 다 잊어버리셨겠지? 친구들과 어떤 남자와 결혼할까 하며 수다를 떨며 코바늘을 뜨는 엄마의 모습을 모습을 상상해본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청춘의 엄마를 말이다. 그리고 미래의 자기의 자녀들에게 입힐 털실 조끼를 만드는 엄마도 보이는 듯하다. 그 화장품 박스는 내 기억에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마도 엄마는 그것을 소중하게 보관하고 계셨던 것 같다. 자신의 처녀시절의 추억의 조각들을 말이다.
한 번은 엄마가 소중하게 보관해온 옷감으로 인형 옷을 만들어 엄마한테 굉장히 혼이 났던 적이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미 그때도 너무 오래되어 철 지난 옷감이었을 뿐인데 엄마는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셨나 보다. 나는 나의 인형이 더 소중했는데 불쌍한 인형은 그렇게 사라졌다. 문득 그때의 기억이 나서 엄마에게 역정을 냈다.
“엄마 그때 왜 그랬어? 오래돼가지고 옷도 못해 입는 옷감으로 인형 옷 좀 만들었다고 딸내미 인형을 버리냐? 엄마 진짜 나쁜 엄마야!”
엄마는 묵묵부답이었지만 조금은 미안해하시는 기색이었다.
이제 그 옷감은 사라지고 없다. 이미 십여 년 전에 엄마가 코바늘 뜨기와 같이 태워버린 것 같다. 어떤 것을 태운다는 것은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 힘들었던 시간 내내 엄마가 소중하게 품고 있던 것을 없애버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보며 떠오르는 기억도 추억도 같이 지운다는 뜻이겠지. 힘들었던 결혼생활 동안 엄마를 지탱해주던 추억들을 엄마는 아무런 미련 없이 소멸시켜 버렸다. 한때는 인생에서 소중했던 그것을 말이다. 그렇게 소중했던 무엇인가가 하나둘씩 사라진다면 엄마는 무엇이 남았을까? 과거도 추억도 모두 버리고 엄마는 삶을 서서히 정리하는 것 같다. 일 년 전 엄마는 말했었다. 이제 자식들도 다 결혼시켰고 내 할 일은 다했으니 이제 잠자듯 죽고 싶다고... 그 말은 들은 나는 울컥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화도 난다.
“죽긴 뭘 죽어! 자식들 다 잘되는 거 보고 죽어야지!”
텅텅 비어 버린 엄마에게는 이제 자식들이 전부이다.
엄마를 채워 드리고 싶다. 이전의 추억보다 더 아름답게 채워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련한 욕심인 걸까?
학창 시절 한문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배웠던 글귀가 가슴에 비수처럼 꽂힌다.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은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