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무엇으로 사는가?
엄마의 결혼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녀 간의 결혼생활이란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결혼함과 동시에 처절하게 알게 되었다. 다만 엄마는 그런 상황에서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 엄마가 가끔 무너진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빠와 싸우셨을 때였다. 내가 기억하기에 엄마와 아빠는 자주 다투셨다. 그러고 나서는 엄마는 종종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 엄마를 보고도 아빠는 개의치 않고 엄마에게 성질만 내셨다. 나 또한 엄마의 그런 모습이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냥 엄마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는 건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엄마를 위로해드렸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엄마는 무엇을 의지하고 사셨을까?’
너무 철이 없고 너무 이기적이었던 그때의 나는 엄마의 슬픔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아빠와의 결혼
엄마와 아빠는 그 시절 대부분의 청춘남녀가 그렇듯 중매결혼을 하셨다고 한다. 엄마가 스물여섯, 아빠는 스물아홉이었다. 지금 시대의 경우에는 이른 결혼하는 것이겠지만 그때는 조금은 늦은 노총각과 노처녀의 만남이었다. 아빠가 마흔아홉에 돌아가셨으니, 아빠와 엄마는 딱 이십 년의 세월을 같이 하셨다.
엄마와 아빠의 만남에는 그 당시 엄마와 같은 지역 사시던 고모할머니가 엄마와 아빠의 다리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고모할머니는 엄마에게 아빠의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넉넉한 집안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 집안 사정을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쌀계’로 그 당시 많은 빚을 지고 계셨다고 한다. 결국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할아버지는 빚을 정리하고 위해 모든 전답과 집을 팔아 빚잔치를 하셨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후 할아버지는 산속으로 이사를 가셨다.
출산 후, 다음날
첫아이를 낳은 다음날 엄마는 제사상을 혼자 준비하셨다고 한다. 추운 겨울이었고 산후이었기에 엄마의 몸은 아주 많이 덜덜 떨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음식을 준비하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불과 몇 년 전에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그것도 내가 고부갈등과 부부갈등으로 험난한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을 때쯤 나를 위로하고자 엄마는 긴 세월 동안 꽁꽁 숨겨놓은 본인의 쓰디쓴 이야기 중 하나를 풀어놓았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조금은 황당했다. 초산인 임산부가 제대로 회복되지도 않은 몸을 이끌고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아무리 단단한 체력을 가진 여자라도 불가능하다고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순간 엄마가 경이롭게 보였다. 그렇게 힘든 시간을 꿋꿋이 지나온 엄마가 나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존재처럼 다가왔다.
이야기를 듣던 나는 엄마에게
“이건 말도 안 돼! 진짜로 그랬다고? 세상에나! 진짜 어이가 없다!”
를 연발했다. 나의 이런 반응에도 엄마는 무심히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제사는 지내야 하는데... 음식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깐 나라도 해야지...”
나는 조금 울먹이며 말했다.
“우리 엄마 너무 불쌍하다!”
2월 초, 추운 겨울, 엄마는 차디찬 부엌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가마솥에 밥을 짓고, 풍로에 불을 붙였겠지. 연기로 까맣게 그을린 천장에 달린 조그마한 전구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여 엄마는 제사상을 준비하셨겠지... 내가 어렴풋이 기억나는 할아버지의 부엌에는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쓴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어떠한 눈빛을 하고 있었을까? 조금은 슬펐을까? 그 슬픔을 잊으려고 고개를 내저었을까?
‘엄마! 진짜 어떻게 산거야?’
엄마는 강한 사람?
엄마는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티를 전혀 내지 않으신다. 엄마는 딸들을 위해서라도 스스로 강해지셨다. 우리가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 사십여 년 간의 시간 동안 엄마는 우리들의 '아낌없는 나무'가 되었다. 마흔이 다 되어서야 나는 깨달았다. 마치 어미 거미의 속을 파먹은 새끼거미와 같은 나 자신을.. 그리고 그런 어미 거미의 속이 거의 비어가 ‘텅텅’ 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것도... 나는 조금 더 빨리 깨달았어야만 했다. 나는 엄마는 늘 건강하실 줄로만 알았다. 엄마는 강한 줄 로만 알았다. 엄마가 늘 그 자리에 있을 줄로만 알았다. 사실, 엄마는 자식들을 위해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텼던 것이었다. 자신을 침식해오는 세월이라는 파도 앞에서는 누구보다 씩씩하게 당당하게 서계셨다.
‘그래 이제는 엄마가 우리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엄마를 지켜줘야만 해’
이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긴 알지만 나는 아직 어리광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점점 약해져 가는 엄마의 변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늘 엄마가 그 자리에 있고 나는 이 자리에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나의 망상이었다.
‘엄마! 나 만약에 이렇게 엄마를 보내게 된다면 나는 너무 후회할 것 같아. 그래서 이렇게 글을 썼어 내가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거든....’
'어린아이가 만든 어설픈 카네이션 같은 나의 글을 엄마 좋아해 줄 거지?'
출산
엄마는 첫 아이를 출산하고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빛바랜 앨범 속에는 마당에서 뒤에 병풍을 세워놓고 그 앞에 누워있는 언니의 백일 사진이 있다. 사진 속 언니는 얼굴이 하얗고 예쁜 아기였다. 엄마는 언니를 보고 어떤 생각이 드셨을까? 첫 아이를 낳은 감격에 차 계셨을까? 아들이 아니어서 조금은 서운하셨을까? 엄마는 그렇게 한 살, 두 살, 다시 두 살 터울로 네 명의 딸만 줄줄이 낳게 되었다.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하게 남아있던 80년대 농촌에서 엄마는 첫딸을 시작으로 줄줄이 딸만 넷을 낳았더랬다. 그때가 추석 명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번은 할아버지께서 낮부터 술을 드시더니 손녀들에게 ‘고추를 달고 오지 않으면 집에 오지도 말라’며 소리치셨다.
하지만 지금은 할아버지의 서글픈 삶을 어렴풋이 느끼기에 이해할 수 있다. 그 당시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박 씨 가문에는 대를 이을 남자가 장손 하나밖에 없었다. 둘째 아들은 딸만 줄줄이 났으니 옛날 사람인 할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답답했을만하다. 결국 할아버지는 큰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화병으로 일흔네 살에 연세에 돌아가셨다. - 이 나이가 왜 내 머리 박혀 있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엄마가 아들을 못 낳았다고 구박하거나 그러시진 않았다고 한다. 그날 할아버지는 많이 울적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엄마와 할아버지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는 없지만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 같다.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오히려 아들 못 낳은 것에 대한 엄마의 서운한 감정은 주로 집에서 느낄 수 있었는데 아마도 아빠의 깊은 아쉬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했지만 딸만 줄줄이 낳았으니 그리고 엄마의 아들 둘, 딸 둘이라는 야무진 자녀계획을 딸 넷으로 대체해 버렸으니 못내 아쉬워하셨다. 막내는 꼭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분만실 들어갈 때까지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결국 막내마저 딸로 태어나자 엄마는 울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 딸들은 고향집에서 모일 때면 엄마에게 장난스럽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엄마가 아들을 낳았으면 지금 같은 시절에 결혼도 못하고 엄마 속을 썩였을 거야!”
“만약 며느리가 있었다면 시누이들 등쌀에 죽어나는 거지!”
이런 말들을 하는 건 아마도 그 시절 우리들이 받았던 구박(?)에 대한 투정 같은 것일지도 아니면 엄마 이젠 아들 따윈 필요 없는 거지?라고 엄마한테 확인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늘 그렇듯, 그 소릴 하는 우리들 뒤에서 엄마는 아무 대꾸 없이 자식들 줄 음식을 열심히 만들고 계신다.
닥애미의 전설
갓 시집온 새댁이었던 엄마에게 큰엄마는 기선을 잡으려고 하셨던 것인지, 텃세를 부리셨던 것인지 시장에서 사 온 털만 정리된 닭 두 마리를 내놓으며 손질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엄마가 제대로 못하실 거라고 예상하셨던 모양이지만 엄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턱턱' 닭을 능숙하게 손질하셨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큰엄마는 '무슨 새댁이 이렇게 닭을 잘 손질하냐'며 놀라셨다고 한다.
엄마는 그런 큰엄마에 조금은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내가 닭 어미유~”
사실 엄마는 결혼하기 전, 병아리를 사서 성계로 키워 파셨다고 한다. 그리고 키우던 닭이 죽으면 그 닭은 손질해서 드셨다고 한다. 그런 엄마에게 닭 두 마리 손질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녔을 터였다. 말 그대로 '닭 어미'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할 말은 하는 엄마는 그날 큰엄마에게 제대로 한마디 하셨던 것이었다. 물론 그동안에 큰엄마에 대한 불만이 쌓여있던 터였다.
이 이야기는 엄마가 아닌 막내 동생을 통해 처음 들었다. 워낙 재밌게 이야기를 하는 막냇동생 덕에 너무 웃겨서 엄마한테 또 들려달라고 졸랐었다. 이젠 우리 집의 전설이 되었다. 고향집에 갈 때마다 이 이야기를 해대니... 그래서 이 이야기의 '닭 어미'를 따와, 나의 이름과 비슷하게 '닥애미'라는 필명을 만들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나?
엄마에게 텃세 아닌 텃세를 부리셨던 큰엄마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엄마는 이제 박 씨 가문에는 엄마와 막내 고모밖에 남지 않았다고 우셨다. 박 씨 가문에 시집와 박 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같이 하던 어쩌면 가장 가까웠던 큰엄마의 죽음은 엄마에게도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나 또한 큰엄마가 많은 고생을 하시면서 사셨던 것을 알기에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엄마가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엄마는 마술사?
어릴 적 엄마가 가끔 친구를 만나거나 모임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에는 아빠는 무슨 심통에서 인지 문을 잠갔다. 그날도 여지없이 아빠는 문을 걸어 잠그셨다.
‘이젠 엄마는 큰일 났구나!’
아마 집에 도착해서는 열리지 않은 문때문에 고생하실 엄마를 걱정하며 서글픈 마음을 안고 잠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보니 신기하게도 엄마는 방에 들어와 계셨다. 그런 엄마를 보며
‘혹시 우리 엄마는 마술사인가?’
하며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그날 밤 엄마는 대나무 장대로 창호지 문을 뚫어 잠든 나를 콕콕 찔러서 깨워 문을 열게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결 한 일이라 기억조차 없기에 참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엄마를 도와드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아빠는 이렇게 엄마가 바깥 활동을 하시는 것을 엄청 싫어하셨는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는 더욱 대외활동을 열심히 하시다 결국은 대통령 훈장까지 받게 되셨다. 원래 낙천적이시고 외향적인 성격인 엄마는 본인의 아픔을 남을 위한 봉사로 승화하셨던 것 같다. 그런 엄마를 나는 늘 자랑스러워한다. 우리 엄마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다.
엄마의 결혼
엄마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아빠의 결혼생활 동안 엄마는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사기 같았던 결혼, 그래도 지켜야 했던 가정과 자신의 아이들, 남편의 죽음, 그리고 그 뒤에 남겨진 삶까지... 엄마의 결혼 생활을 딸인 나의 마음대로 정의 내려 혹시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부간의 일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 엄마의 이런 모진 삶에 나의 삶을 투영시켜보는 것은 어쩌면 딸인 나로선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엄마는 이럴 때 어땠을까? '
'나처럼 그랬을까?'
'엄마는 이런 고통을 어떻게 견디어냈지?'
'왜 아프다 말을 안 했을까?'
'내가 알아채지 못한 거겠지?'
‘엄마도 부모님에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겠지?’
‘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미안해하셨을 거야.’
엄마와 나의 삶은 다른 듯 닮은 듯하다. 그래서 그 닮은 인생의 고개를 만날 때마다 나는 엄마를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지난날의 철없던 행동들이 후회된다.
나는 안다. 어른이 되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에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되면 엄마가 나보다 더 걱정하고 힘들어하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엄마의 인생도 힘든데, 거기에 나의 짐까지 넘겨드릴 수는 없다.
이십 년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고 짧았던 엄마와 아빠의 결혼생활, 곱디곱던 새색시는 어디 가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손과 발에는 고생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그러한 흔적들을 지워주지는 못하고 늘 엄마에게 받기만 한다.
'엄마 미안해! 내가 진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