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토마토

by 닥애미

왜 토마토 농사?


아빠의 고향에서 살던 우리는 좀 더 나은 기회를 위해 엄마의 고향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토마토 농사를 시작했다. 우리는 엄마의 고향 동네에서 좀 떨어진 외딴곳에 살았다. 처음 토마토를 수확하고 출하를 했었을 때, 부모님은 실수를 하셨다. 토마토는 열매 끝에 붉은 기가 살짝 돌 때 따야만 유통과정 중에 후숙 되어 상품성이 있는 것인데 농사 초보였던 부모님은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따서 공판장에 출하하려고 경운기로 운반하셨다. 잘 익은 토마토는 경운기 진동 때문인지 물러 터져 버렸다. 결국 팔지 못하고 그대로 가져와 버리셨다고 한다. 그때의 착잡했을 부모님의 마음은 나중에 사업실패의 경험을 통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좀 더 잘 살아 보려 했던 노력들이 이렇게 실패라는 결과로 돌아올 때 부모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을 보며 견뎌 내셨을 것이다. 이렇듯 실패로 시작한 토마토 농사였지만 그 뒤로 십여 년간을 토마토 농사를 지어 우리를 먹이고 입히셨으니 토마토는 참으로 고마운 작물임에 틀림없다.


그때 엄마와 아빠와 우리가 있었다. 힘들었지만 즐거웠고 행복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시작과 끝


토마토 농사의 시작은 늦겨울부터 시작된다. 종자를 물에 흠뻑 젖신 거즈에 감싸고 또 물에 적신 수건으로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어 싹을 틔운다. 종자를 키울 육묘용 비닐하우스 한동을 만들었고 흙은 채에 쳐 곱게 준비한다. 거기에 싹 틔운 종자를 심은 다음 약 10센티 정도로 키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모종이 얼지 않도록 비닐과 보온 덮개로 겹겹이 덮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키운 어린 모종을 포트에 옮겨 심었는데 여기서 우리들의 역할이 있었다. 바로 주전자에 물을 담아 옮기는 일과 겹겹이 포개진 포트를 빼서 작업하시는 분들에게 건네는 일이었다. 제대로 똑바로 설 수 없던 하우스 안에서 주전자를 한 손에 들고 비스듬히 걷기에 허리가 아팠다. 그리고 그 포트에 심긴 모종이 어느 정도 컸을 때 정식을 한다. 우리는 정식을 할 모종을 나무 궤짝에 담아 옮겼다. 그러다 모종을 하나라도 부러뜨리면 아빠한테 엄청난 꾸중을 들어야만 했다. 그렇게 토마토가 자라면서 지지대와 끈으로 쓰러지지 않도록 세워줘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곁순 제거'! 이것을 계속적으로 해줘야만 한다. 이것을 해주지 않으면 곁순으로 영양이 다가 열매가 제대로 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비닐하우스 안에 토마토는 자연수정이 불가능하므로 꽃이 피면 일일이 꽃송이 잡고 '꽃물'에 적셔 인공수정을 해줘야 만한다. 토마토의 첫 수확은 5월 초였다. 그리고 약 한 달 반의 기간 동안 계속 토마토를 출하를 하고 토마토가 끝물이 되면 걷어내고 비닐하우스를 철거하고 조금은 늦은 모내기를 하기 위한 로터리 작업을 했다. 때로는 이 작업이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기도 했는데 아직도 그때의 개구리와 맹꽁이의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엄마와 토마토 농사


엄마와 아빠는 토마토 농사에서 나름의 분업체계가 있었는데 토마토는 따는 것은 엄마가 딴 토마토를 노란 플라스틱 컨테이너에 수거하여 작업장으로 나르는 일은 아빠가 했다. 오뉴월의 비닐하우스 안은 매우 덥기에 엄마는 새벽부터 토마토 따기를 시작했다. 토마토의 색깔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엄마의 토마토 따는 소리만이 비닐하우스 안을 채운다.

'똑똑 똑똑'

엄청 빠른 박자로 엄마의 토마토를 따는 소리가 난다.

늘 학교가 끝나면 엄마가 토마토를 따고 있는 비닐하우스로 달려갔다.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한증막 같은 열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종알종알 엄마에게 말을 한다. 시험 본 이야기, 궁금한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그러다 간혹 엄마는 더위에 치쳐 가만히 있기도 했다.

"엄마 뭐해?"

"너무 힘들어서..."

엄마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비닐하우스 여섯 동에서 나오는 토마토의 양은 상당했다. 한창 수확 때는 토마토의 익는 속도가 수확하는 속도를 따라 잡기 때문에 빨리 따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 기른 토마토를 싸게 팔 수밖에 없다. 엄마는 그렇게 늘 홀로 새벽부터 오후 한 두시까지 무더운 하우스 안에 쪼그려 앉아 토마토를 따셔야 했다. 땀방울이 눈으로 흘러든 탓인지 엄마는 백내장에 걸려 수술도 받으셔야 만 했다. 몇 년 전 엄마와 나 언니 셋이서 고추를 따다 어느새 고추 따기 시합처럼 되었는데 엄마의 고추 따기 실력은 나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도무지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손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고 따는 소리는 경쾌했다. 결과는 1등은 엄마, 2등은 언니, 3등은 나였다.

"이렇게 느려 터져서 회사는 어떻게 다닌 다냐!'

"내가 사장이면 넌 쫓겨났어"

엄마와 언니로부터 동시에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엄마도 처음부터 그렇게 빠른 손은 아니셨겠지? 엄마의 삶은 엄마를 '따기 달인'으로 만들었다.




다마 살이


수확이 부모님의 몫이라면 수확된 토마토를 크기 별로 분류하는 작업은 우리의 역할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다마 살이'라고 불렀다. 짙은 회색의 보온덮개가 깔려 있는 작업장 바닥 위에 토마토가 터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부어주면 우리는 아빠가 정해 준 기준에 따라 특대, 대, 중, 소, 홍(익은 것), 기형으로 토마토를 분류했다. 어린 우리들이 눈대중으로 크기를 구분하기는 어려웠다. '이게 맞는 건지?'스스로도 의심스러웠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분류했었다. 하지만 어설퍼서 늘 아빠가 재분류를 해야만 했다. 다음 단계는 박스 접기! 우리는 아빠가 가져다준 박스를 마치 경쟁하듯 접였다. 너무 많이 접어서 혼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합도 할 수 있던 박스 접기는 그나마 재밌었다. 박스에 토마토를 담는 것은 아빠의 몫이었다. 박스에 담을 토마토를 소쿠리에 담아 저울에 무게를 달아 아빠에게 갖다 드리면 아빠는 정성스럽게 하나 씩 하나씩 토마토를 박스에 담았다. 담기를 마치면 박스의 윗 날개 접고 박스 위에 순번과 토마토의 크기와 아빠의 이름을 적었다. 토마토 따기를 마친 엄마는 오후 한두 시쯤에 하우스에서 나왔다. 바로 점심밥을 해먹기도 했지만 자주 중국집에서 시켜먹곤 했는데 엄마는 늘 짬뽕을 드셨다. 나도 나이 들어서부터 가족들끼리 중국집에 갈 때마다 짬뽕을 먹으니 이것도 대물림인 건가?


한편 기형 토마토도 많이 나왔는데 그런 것은 가장 낮은 가격으로 공판장에 판매되었다. 기형 토마토는 토마토 두 개가 붙어있는 것도 있었고 마치 주전자 주둥이처럼 과실 옆에 뾰족하게 돋아 있는 것도 있었다. 작업장에서 심심해진 우리들은 그것은 한입 베어 물고는 나머지는 멀리 던져 버렸다. 그때는 토마토가 넘쳐나니까 그런 것도 허락되었다.


300


그날 우리는 평범하게 토마토를 수확을 도왔다. 아빠는 열심히 토마토를 박스에 담았다. 토마토는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고 담아도 담아도 줄지 않았다. 유월의 긴 해는 어느덧 저물었고 밤이 되었다. 노란 전구빛 아래의 토마토 색은 혼란스러웠다. 공판장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 막판에는 토마토를 박스에 부어 넣었다. 그날 우리는 처음으로 300박스 출하라는 신기록을 달성했다. 공판장으로 출발하는 트럭을 바라보며 가격을 잘 받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토마토 가격은 출하량에 반비례했다. 한창 수확 때는 가격이 떨어진다. 300박스라는 양만큼 가격도 좋게 나왔으면 좋으련만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300박스'의 기록은 우리 가족의 추억으로 남았다.


그 당시 대전공판장이 농산물 가격이 잘 나오는 편이라 대전까지 가서 토마토를 출하했다. 어린 시절 호기심에 그 '공판장'이란 곳은 어떤 곳인지 무한 상상을 했었다. 쫓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좌석 뒤에 공간에 숨었다. 엄마도 어쩔 수 없이 나를 데리고 갔다. 대전 공판장에 도착해서 경매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경매사 아저씨가 못 알아듣는 말로 '옹알옹알'하면 순식간에 가격이 결정되었고 낙찰이 되었다. 우리 토마토도 그렇게 순식간에 경매가 끝났다. 나는 더 이상 졸음을 참을 수 없어 차에 들어가 잤다. 그리고 어느새 집에 와있었다.


토마토 농사를 짓는 시기는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가장 넉넉한 시기였다. 대전에서 엄마가 돌아오실 때 종종 엄마의 두 손에는 맛있는 것들이 들려 있었다.

토마토잼을 발라먹으면 맛있는 옥수수 식빵, 치킨 도 있었고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해삼과 멍게도 사 오셨다.

그리고 오뉴월의 제철음식도 있었다. 하지감자를 넣은 갈치조림, 완두콩밥, 아욱국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 시절이 생각난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것이 얼마나 따스했던지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나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득하다.


마지막 토마토 농사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아빠의 죽음과 함께 토마토 농사는 끝났다. 그것이 어떻게 끝났는지 구체적으로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하기 싫다. 우리는 이별의 큰 상처와 함께 아빠와 함께 토마토 농사를 떠나보냈다.

농사짓느라 고생하시던 부모님, 그 사랑 안에 재잘대던 우리들, 그날의 향기와 소리와 빛의 밝기조차 기억나는데 이제는 만질 수도 돌아갈 수 도 없다.

'보고 싶어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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