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역사
언니가 병설유치원에 입학할 때의 일이다. 아이들을 맡길 때가 없던 엄마는 우리를 할아버지 댁에 맡기려고 하셨지만 때마침 할아버지께서는 외출 중이셨고 아이들을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 댁에 두고 언니만 데리고 유치원에 갔다. 엄마가 유치원에 가있는 동안 나는 혼자 할아버지 집을 나와 집으로 가버렸고 할아버지 집에 홀로 남은 동생은 기저귀에 똥을 싸서 여기저기 묻히고 있었더란다. 엄마는 사라진 나를 얼마나 찾았을 것이며 남겨진 동생은 홀로 얼마나 울었을 것인가? 아기가 똥을 싸는 건 당연한 일인 대도 어릴 적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들은 동생을 ‘똥싸개’라고 놀렸다.
그때의 일인지 아닌지도 모를 어렴풋한 기억이 있는데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조차 모르겠다. 할아버지 댁을 나와 홀로 걸어갔다. 아주 큰 굴삭기가 있어 겁을 먹고 길을 지나갈 수 없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굴삭기를 지나 집으로 돌아갔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엄마 혼자 키우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이런 사건도 있었다.
어릴 적 아주 가끔은 엄마와 아빠는 우리들을 떼놓고 모임을 가시곤 했는데 그때 너무 어렸기에 우리들은 엄마와 아빠가 오기 전까지 울곤 했다. 나의 울음이 하늘에 닿아 엄마가 빨리 오게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한 번은 농사일은 하러 가야 하는데 너무 어렸던 동생은 데리고 갈 수도 없고 동생을 묶어서 방에 두었다고 한다. 그 사이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는데 아기가 묶여 있는 모습에 적잖이 충격이 받으셨던 것인지 설교시간에 '요즘도 옛날처럼 아기 묶어 키우는 집이 있다'라고 하셨다고 한다. 설교를 듣던 엄마는 뜨끔 하셨다고...
이번 이야기는 엄마가 싫어하실 수도 있어 조금은 신경 쓰이지만 슬픔도 아픔도 인생의 한 부분이기에 그대로 남기고 싶다.
구멍 난 문
얼마 전 엄마가 집을 수리하셨다. 창문과 집안의 문을 다 교체했다. 거기에는 삼십 년째 구멍이 난 채 방치되었던 안방 문도 있었다. 구멍은 내가 냈었다. 어린 시절 우리 자매는 엄청 싸웠었다. 서로 때리고 도망가기 일쑤였는데 그날은 언니가 날 때고 안방 문을 잠가 버렸다. 너무 화가 난 나는 영화'샤이닝' 잭 니콜슨처럼 장도리로 문을 내려 찍었다. 문에는 너무 간단하게 구멍이 뻥 났다. 나는 자매들 중 제일가는 사고뭉치였다. 집에 있는 시계, 라디오, 전화기는 나의 손을 거치면 죄다 고장 났다. 라디오는 작은 난쟁이들이 그 안에서 살면서 목소리를 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불장난도 많이 했었다. 엄마 아빠가 안 계실 때 방에서 철로 된 아로나민 골드 통에 종이 찢어 불로 태웠었다. 그러다 혹시 이불에 불이라도 붙었다면 진짜 큰일 날 뻔했다. 이런 나를 외할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불이나 다 타버린 다른 집에 데려가 교육시키기도 했다. '이것 봐라! 불내면 이렇게 불이 난다 잘 봐 둬라!'나는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구멍 난 분은 지그만치 삼십 년이 지난 후에 바꿨으니 조금은 나의 어릴 적 추억거리 하나가 없어지는 느낌과 좀 더 일찍 집을 고쳐드리지 못했다는 후회가 마음이 교차되었다. 결혼하기 전 지금보다 상황이 좋았을 때 집을 고쳐 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 같았선 지금 엄마가 사는 집을 밀어버리고 생활하기 편한 스타일의 전원주택을 지어드리고 싶다. 마음만은 뭐든 좋은 걸로 해드리고 싶다.
엄마의 육아는 계속된다.
우리 식구는 여섯이었다. 아빠, 엄마, 딸 넷! 크레파스로 방 벼락 가득 낙서를 해놓았었다. 그 방안으로 엄마는 아침, 점심, 저녁 한상 가득 밥상을 들고 들어오신다. 늘 푸짐한 밥상이었다. 사시사철 제철음식으로 가득했는데 아직도 때에 따라먹던 음식을 못 먹으면 허전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게 여섯 식구가 둘러앉아 밥을 먹던 기억이 살아갈 힘이 되고 있다. 우리 집은 늘 시끌 버쩍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큰소리를 내실 때가 많았다. 우리도 서로 싸우기도 했고 누가누가 소리 크냐며 소리지르기도 많이 하곤 했다. 그 때문에 사위들이 우리 집의 실체를 알고 당황하기도 했는데 도대체 싸우는 건지 대화를 하는 건지 어찌할 바를 몰라 눈치만 보았다 한다.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는 사위도 있다.-내 남편
엄마의 육아는 끝이 없다. 사실 기저귀만 안 갈아 주었을 뿐이지 본가에 가는 나는 누워만 있고 엄마가 밥을 해다 받쳐야 먹는 어른 아기다.
"여기 밥 대령했습니다. 드세요!"
엄마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면 그제야 방바닥에 붙어 있던 몸을 일으켜 밥숟갈을 뜨곤 한다. 난 아직 어린아이 같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어리광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안다. 얼마 남지 않은 호사임을 말이다.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할 때 엄마는 절대 먼저 식사를 하지 않으신다. 일단 사위와 자식, 손주들까지 다 먹이고 나서 한 숟갈을 뜨신다. 우리들이 다 먹기까지 마치 새끼를 기르는 어미새처럼 계속 반찬을 나르신다. 엄마는 그것을 자식에 대한 예의라고 말씀하신다. 각자의 삶터에서 고생할 자식들에 위한 엄마의 마음 같은 거라고 하셨다. 곧 엄마의 생신이다. 엄마는 자신의 생신상의 직접 차리실 생각이신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이런 엄마! 말로 표현할 수 없도록 고맙고 또 고맙다.
'엄마 미안한데 죽을 때까지 나를 키워줘야겠어. 낸들 어쩌겠어! 사람새끼가 원래 이런 건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