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고 난 뒤, 나는 왜 바보가 되었는가

by 밀잠자리

17마일,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약 27km에 달하는 장거리 주 훈련을 마쳤다. 러너들 사이에서는 엘에스디 즉 롱 슬로우 디스턴스라 불리는 이 훈련은 말 그대로 천천히 그리고 길게 달리며 지구력을 기르는 과정이다. 캘리포니아의 겨울답게 날씨는 제법 쌀쌀했지만 하늘은 수정처럼 청명했고 주로의 컨디션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느껴지는 상쾌함 그리고 일정한 리듬으로 지면을 박차는 발소리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을 만끽하며 나는 27km라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무사히 완주했다. 피니시 라인에 섰을 때 내 몸은 적당히 노곤하면서도 기분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도파민과 엔돌핀이 왈츠를 추는 듯한 황홀한 기분. 흔히 말하는 러너스 하이의 절정이었다. 적어도 식당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내가 완벽하게 정상이라고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더 뛰어난 상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료들과 함께 오늘 훈련 정말 좋았다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허기진 배를 부여잡으며 근처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 안은 점심시간을 맞아 사람들로 북적였고 맛있는 음식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묘한 일이 벌어졌다.


메뉴판을 펼쳤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긴 하는데 머리로 입력이 안 되는 기분이었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라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근래 들어 침침해진 눈이 노안 때문에 좀 더 심해진 것인가 하고 눈을 비벼보았다. 하지만 시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글자를 읽을 수는 있는데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뇌의 언어 처리 센터로 전달되지 않고 중간에서 증발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옆에 앉은 후배가 물었다. 형님 뭐 드실래요 여기 설렁탕이 국물이 진하고 맛있대요.


평소라면 메뉴판도 안 보고 난, 특 파 많이 라고 0.1초 만에 즉답했을 텐데 뇌와 입을 연결하는 회로가 잠시 끊어진 것처럼 말이 헛돌았다. 어 그 으으 뜨끈한 거 그거.


분명 머릿속에는 뽀얀 국물의 설렁탕이라는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는데 그 설렁탕이라는 단어가 혀끝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오질 않았다. 마치 혀가 치과에서 마취 주사를 맞은 듯 둔하게 느껴졌고 머릿속은 하얀 안개가 낀 것처럼 멍했다. 평소의 빠릿빠릿하고 논리정연하게 말하기를 좋아하는 수다쟁이 밀잠자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배터리 방전 직전의 로봇처럼 앉아 있었다. 젓가락을 쥐는 손끝의 감각도 무디고 물컵을 집으려는데 거리감이 잘 느껴지지 않아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친구들의 의아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이 내 얼굴에 꽂혔다. 형님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얼굴이 좀 멍해 보이시는데요. 어 아냐 그냥 좀 멍하네 밥 먹자 밥.


겨우겨우 식사를 마치는 둥 마는 둥 하고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따뜻한 대추차 한 잔을 주문해 호호 불어가며 들이켰다. 뜨끈하고 달콤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장에 도달하자 그제야 비로소 머릿속에 낀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꺼져가던 전구에 다시 전기가 들어오듯 뇌세포들이 하나둘씩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감각이었다. 그때부터는 다시 입이 터지기 시작해서 평소의 수다쟁이 모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야 아까는 진짜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너스레를 떨면서 말이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소파에 눕자, 도대체 아까 그 현상은 뭐였지 내가 왜 그랬을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이가 들어서 뇌세포가 죽은 건가. 어제 마신 맥주가 뇌를 녹였나. 아니면 벌써 치매의 전조 증상인가. 장거리 달리기 후 급격한 인지 능력 저하와 언어 장애라니. 이것은 내 몸이라는 시스템에 발생한 심각한 버그였다. 나는 노트북을 펴고 문헌을 뒤적이며 디버깅을 시작했다. 원인을 규명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아주 과학적이고 안도감 드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건 내가 멍청해진 게 아니라 우리 몸이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생존 모드를 발동시켰기 때문이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이 현상을 설명하는 아주 있어 보이는 전문 용어가 있다. 일시적 전두엽 기능 저하. 영어로는 Transient Hypofrontality라고 한다. 이름부터 뭔가 심오하고 전문적이지 않은가.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장거리 달리기와 같은 격렬한 유산소 운동을 장시간 지속할 때 우리 몸의 CEO인 뇌는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한다. 뇌는 이렇게 외친다. 비상 비상 지금 주인놈이 2시간 넘게 미친 듯이 달리고 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건 다리 근육을 움직일 에너지와 넘어지지 않게 균형을 잡을 감각 정보 처리다. 혈액과 에너지를 죄다 운동 피질과 감각 피질로 보내. 그럼 나머지 부서는요. 다 전력 차단해 지금 철학하고 논리 따질 시간 없어.


이때 가장 먼저 전기가 끊기는 부서가 바로 전두엽이다. 전두엽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고차원적인 사고 논리적 판단 미래에 대한 계획 그리고 정교한 언어 구사를 담당하는 엘리트 부서다. 평소에는 가장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지만 사자가 쫓아오거나 혹은 스스로 사자가 되어 먹잇감을 쫓아 달리는 위기 상황에서는 당장 생존에 불필요한 사치스러운 기능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즉 다리를 끊임없이 움직이고 거친 호흡을 유지하느라 바빠서 말을 예쁘게 하고 메뉴를 고르는 고차원적인 논리 기능 따위는 잠시 퓨즈를 내려버린 것이다. 그러니 내가 식당에서 어버버 했던 건 내 뇌가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초절전 모드에 들어갔다는 명백한 증거다. 나는 바보가 된 게 아니라 지극히 효율적인 생존 기계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에너지 고갈 문제도 있다. 17마일을 달리는 동안 내 몸속의 고급 휘발유인 글리코겐은 바닥을 드러냈을 것이다. 뇌는 아주 까다로운 편식쟁이라 오직 포도당만을 에너지원으로 쓴다. 그런데 장시간 운동으로 혈당이 뚝 떨어지는 저혈당 상태가 되니 뇌라는 고성능 CPU에 공급되는 전압이 부족해져 버벅거리는 렉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 현상을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봉크가 왔다고 표현하고 러너들은 벽을 만났다고도 한다. 식당에서 밥이라는 탄수화물을 먹고 카페에서 달달한 유자차라는 단당류를 마신 후 멀쩡해진 건 뇌에 다시 연료가 주입되면서 재부팅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당 떨어진 데는 설탕이 최고다.


게다가 날씨도 한몫했다. 이날은 꽤 쌀쌀했다. 추운 날씨에 장시간 달리면 우리 몸은 체온을 뺏기지 않기 위해 혈액을 심장이나 뇌 폐 같은 중요 장기 즉 코어로 몰아준다. 자연히 얼굴 근육이나 입술 같은 말초 부위로 가는 혈류량은 줄어들어 얼어붙고 굳어진다. 입술이 얼어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발음이 새는 구음 장애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따뜻한 카페에서 몸이 녹으니 입도 풀린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물리적 현상이었다.


물론 주의해야 할 점도 있다. 혹시 내가 맹물을 너무 많이 마셔서 체내 전해질 균형이 깨진 저나트륨혈증은 아니었는지 체크해봐야 한다. 저나트륨혈증도 의식 혼미나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을 유발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날 나는 전해질 음료를 꼬박꼬박 챙겨 마셨으니 이건 용의선상에서 제외다.


결론적으로 달리고 나서 말이 어눌해지고 멍했던 건 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치열하게 달렸다는 훈장 같은 생리 현상이었다. 내 뇌가 스스로의 고차원적 기능을 잠시 포기하면서까지 내 두 다리를 응원하고 지원했다는 감동적인 스토리인 것이다. 고생했다 전두엽아. 네가 희생한 덕분에 27km를 무사히 완주했어.


그러니 여러분 혹시 주말에 장거리 뛰고 나서 헛소리하는 동료가 있더라도 혹은 메뉴판을 보고 멍하니 침을 흘리는 친구가 있더라도 쯧쯧 벌써 갔네 갔어 라고 혀를 차거나 비웃지 마시라. 그들은 지금 뇌세포까지 근육으로 바꿔가며 전력 투구한 용사들이다. 대신 조용히 설탕 듬뿍 든 따뜻한 음료수를 건네주시라. 형님 이거 드시고 뇌 좀 켜세요 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도 교훈을 얻었다. 다음번 30km 훈련 때는 중간중간 에너지 젤을 더 꼼꼼히 챙겨 먹어야겠다. 아무리 뇌가 근육을 돕는다고 해도 식당에서 메뉴 정도는 또렷하게 주문해야 하지 않겠는가.


달리기는 발로 하는 것이지만 결국 뇌가 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뇌도 좀 쉬고 싶어서 나 잠깐 꺼질게 하고 파업하는 그 순간. 그 멍한 무중력 상태야말로 어쩌면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러너들만이 느낄 수 있는 생각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진정한 해방의 순간이 아닐까. 비록 남들이 보기엔 좀 바보 같아 보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에서 로그아웃된 가장 평온한 상태일 테니까. 나는 이 멍함을 즐기기로 했다. 이것은 바보가 되는 시간이 아니라 뇌를 씻어내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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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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