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내 달리기의 폐혜
느즈막한 오전의 짐 은 한가로움이라는 단어와 동의어일 것이라 막연히 짐작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출근 전쟁을 치르고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카페인을 수혈하며 모니터와 씨름하고 있을 시간이고, 가정주부라면 집안일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거나 브런치를 즐길 타이밍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 틈새 시간을 공략하여 마치 전세 낸 듯 여유롭게 즐기는 것을 꿈꾸며 짐으로 향했다. 유유자적하게 스트레칭을 하고, 아무도 없는 랙에서 스쿼트를 하며, 내가 원하는 채널을 틀어놓고 트레드밀을 달리는 상상.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모든 것은 보기 좋게 빗나간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에, 점심 식사가 채 되기도 전인 이 애매한 시간에도 득근을 향한 인류의 열정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벤치프레스에는 이미 대기열이 생겼고, 덤벨 존은 거친 숨소리와 쇠질 소리로 가득했다.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곳은 유연근무제를 하는 엔지니어들과, 체력 관리에 목숨 건 철인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이었다.
망연자실하게 유산소 존을 스캔했다. 수십 대가 늘어선 트레드밀 위에는 이미 부지런한 다리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의 부품처럼 일사불란했다. 그때, 기적처럼 트레드밀 딱 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아니 금요일 밤 강남대로에서 발견한 빈 택시 같았다. 나는 선생님께 칭찬 스티커를 받고 아이스크림까지 받아 든 유치원생처럼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 빈자리로 재빠르게 올라탔다. 양옆에 사람이 꽉 차 있는 것이 조금 거슬렸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일단 천천히 걸으며 기계의 상태를 점검하고 주변 분위기를 살폈다. 왼쪽에는 연륜이 느껴지는 중년의 아저씨가 시속 5.5마일 정도의 속도로 가볍게, 하지만 꾸준하게 조깅 중이었다. 그의 호흡은 안정적이었고 자세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반면 오른쪽에는 헬스 좀 했다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건장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시속 7마일이라는 꽤 빠른 속도로 쿵쿵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반팔 티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삼두근이 그의 달리기 속도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나는 그 둘 사이에서 평화의 사도이자 균형의 수호자처럼 시속 6.5마일로 세팅했다. 너무 느리지도, 그렇다고 너무 빠르지도 않은, 적당히 땀을 흘리며 유산소 운동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아주 모범적인 속도였다.
스타트 버튼을 누르고 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계기판의 숫자는 분명 6.5를 가리키고 있는데, 내 다리에 전해지는 체감 속도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평소 내가 알던 6.5마일의 부드러운 리듬이 아니었다. 발바닥이 벨트에 닿자마자 뒤로 홱 채가는 듯한 강력한 토크가 느껴졌다. 이건 최소 8.5마일 급의 속도였다.
나는 직감으로 즉시 상황을 파악했다. 이 기계는 병들어 있었다. 모터의 회전수를 제어하는 센서의 캘리브레이션이 완전히 망가져 있거나, 계기판의 표시 속도와 실제 벨트 구동 속도 간의 매핑 데이터가 꼬여있는 게 분명했다. 어쩐지, 피크 타임에 이 자리만 덩그러니 비어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사람들의 동물적인 감각은 데이터보다 빠르다. 누군가 타보고 식겁해서 내려간 죽음의 자리였던 것이다.
오른쪽의 건장한 청년보다 내 케이던스가 확연히 높았다. 분명 계기판상으로는 내가 더 느린데, 실제로는 내가 더 죽어라고 발을 굴러야만 벨트 뒤로 밀려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치 마라톤 레이스 출발 총성과 함께 선두 그룹이 튀어 나가는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심박수는 예열도 없이 수직 상승했고, 가쁜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이대로 가다가는 5분도 못 버티고 나가떨어질 판이었다. 결국 나는 생존을 위해 황급히 속도 버튼을 연타하여 5.5까지 낮추고서야 겨우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계기판은 5.5라고 표시하고 있었지만, 내 몸이 느끼는 속도는 평소의 7.0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 급격한 위기 대처, 즉 황급히 속도를 줄인 행위가 양옆의 러너들에게는 전혀 엉뚱한 시그널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들은 나의 불규칙한 속도 변화를 감지하고 나를 힐끔거리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어라, 지금 나 견제하는 거야, 아니면 페이스 조절하면서 나랑 한번 붙어보겠다는 건가라고 해석한 듯했다. 남자의 승부욕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낯선 사람끼리, 단지 옆에서 달린다는 이유만으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속도 올리기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왼쪽 아저씨는 7.0으로, 오른쪽 건장남은 7.5로 속도를 높였다.
트레드밀 계기판의 비프음이 띠딕, 띠딕 하고 울릴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뜨거운 승부욕은 전염병처럼, 혹은 하품처럼 나에게도 옮겨붙었다. 내 머릿속의 이성은 소리쳤다. 제발 그 손가락 접어. 이 기계 고장 났다니까. 지금 속도 올리면 죽음이야. 하지만 남자의 자존심, 혹은 러너의 쓸데없는 오기는 이성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했다. 나의 검지는 기어코 독립선언을 하며 플러스 버튼을 눌러 8.0을 만들고 말았다.
미친 짓이었다. 고장 난 트레드밀에서의 8.0은 체감상 시속 10마일,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시속 16km에 육박하는 전력 질주 수준이었다. 벨트 위에서 내 다리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쿵쿵쿵쿵. 이제는 운동이 아니라 자존심 싸움이었다. 내가 저들보다 1초라도 더 버텨야 한다. 내가 이 구역의 미친 러너라는 걸 보여줘야 한다. 도대체 누구에게, 왜 증명해야 하는지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저 벨트가 도니까 나는 달릴 뿐이었다.
과연 내가 몇 분을 버틸 수 있을까. 저들은 대체 어디까지 따라올 셈인가.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듯이 뛰었고, 땀은 비 오듯 쏟아졌다. 걱정이 태산처럼 쌓여갈 무렵, 약 5분 뒤 왼쪽 아저씨가 먼저 스톱 버튼을 눌렀다. 그는 숨도 고르지 않은 채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며 급히 기계에서 내려갔다. 아마도 무리한 페이스 업으로 인한 급격한 체력 저하가 원인인 듯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휴, 한 명 제꼈다.
하지만 진짜 적수는 오른쪽에 있었다. 오른쪽 헬창은 끈질겼다. 그는 힐끔힐끔 내 계기판을 끊임없이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내 속도가 8.0인 것을 확인한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보란 듯이 8.1로 속도를 올렸다. 고작 0.1 차이. 그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나는 너보다 강하다, 나는 너보다 빠르다는 것을 그 소수점 한 자리로 증명하려 드는 유치하고도 진지한 선전포고. 그래도 그 0.1이 여간 눈에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런 유치한 도발에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태생이 숫자에 민감하고, 러너라 누군가 내 앞을지나가는 꼴을 못 보는 나는, 그와 함께 한계를 넘어보기로 결심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과감하게 8.5를 눌렀다.
다행인 것은, 이 고장 난 기계가 물리적 한계에 다다랐는지 8.0이나 8.5나 똑같이 죽을 것 같은 속도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더 이상 빨라질 수 없을 만큼 이미 빨랐기에, 계기판의 숫자가 올라가도 벨트 속도는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할만하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태연한 척 달렸다. 반면 헬창 친구는 나의 속도 변화에 당황한 듯했다. 그는 자신의 속도를 더 올려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이미 그의 숨소리는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었다. 그의 보폭이 눈에 띄게 넓어지며 밸런스가 무너졌고, 착지 소리가 쿵, 쿵 하고 깊고 무겁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계 신호였다. 그 신호를 포착한 나는 영화 속 캡틴 아메리카의 대사를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마인드를 세팅했다. 난 이거 하루 종일 할 수 있어( I can do this all day) . 사실은 1분도 더 못 할 것 같았지만, 표정만큼은 올림픽 결승선에 들어오는 마라토너처럼 비장하고 평온하게 유지했다.
결국 헬창은 무너졌다. 그는 헐떡거리며 속도를 내리고 쿨다운 모드로 전환했다. 걷기 시작한 그를 곁눈질로 확인하며 나는 작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승자의 여유를 부리기엔 내 상황도 처참했다. 바로 멈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그를 경쟁 상대로 의식하고 뛰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원래 이 속도로 뛰는 사람인 척, 아주 태연하게 더 달려야 한다는 쓸데없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그렇게 지옥 같은 몇 분을 더 달렸다. 허벅지는 터질 것 같았고 폐는 찢어질 것 같았다. 그가 수건을 챙겨 기계에서 완전히 내려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나는 비로소 속도 줄임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벨트가 천천히 돌기 시작하자 현기증이 밀려왔다. 땅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이제 좀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걸으려는데, 아뿔싸. 양옆 빈자리에 새로운 선수들이 올라탄다. 에너지 넘치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청년이 가볍게 몸을 풀며 계기판을 세팅하고 있었다.
순간 공포가 밀려왔다. 만약 저들과 2차전을 벌이게 된다면. 이번엔 100퍼센트 부상이다. 나는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평소 쿨다운 속도인 3.8마일보다 훨씬 낮은 3.2로 맞춰야 겨우 걷는 속도가 나왔다. 분명히 이 기계는 병이 들었고, 그 병든 속도가 내 안의 잠자던 승부욕을 깨워 쓸데없는 경쟁을 유발하고 있었다. 이 기계는 러너의 영혼을 갉아먹는 흡혈귀였다.
이런 악마의 트레드밀 같으니라고. 나는 도망치듯 스톱 버튼을 누르고 내려왔다. 바닥에 발을 디디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평소라면 1시간은 거뜬히 채웠을 운동 시간이지만, 고장 난 기계가 주는 무리한 속도와 그로 인해 뒤틀려버린 멘탈 탓에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짐을 나서야 했다.
탈의실로 향하며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땀에 젖어 벌게진 얼굴은 흡사 술에 취한 사람 같았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달렸는가. 이름 모를 청년과의 자존심 싸움에서 이긴 대가로 얻은 것은 너덜너덜해진 다리와 조기 퇴근뿐이었다. 하지만 샤워기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승부는 꽤 짜릿했다고. 남자의 삶이란, 그리고 러너의 삶이란 가끔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오기로 굴러가기도 하는 법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다음엔 꼭 정상인 기계를 선점하리라 다짐하며, 나는 도망치듯 짐을 빠져나왔다. 문밖의 공기가 유난히 시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