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실조라니 내 무덤을 내가 팠지

입조심

by 밀잠자리


2025년 12월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여운이 남아 있지만 딱히 할일이 없는 시기. 평소 가족끼리 가깝게 지내던 지인분의 초대를 받게 되었다. 송년회 겸 서로의 최신 근황도 나눌 겸 마련된 자리였지만. 아저씨들끼리는 간만에 눈치 보지 않고 푸짐하게 건배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게다가 남의 집 식탁에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호사라니. 우리 집 식탁에서는 도통 구경하기 힘든 남의 집 밥을 맛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주 즐겁고 설레는 이벤트라 할 수 있었다.


우리 집 식탁 사정을 잠시 털어놓자면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 일단 집사람의 입이 아주 짧다. 그리고 그녀는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슴슴한 간을 선호하고 끼니때마다 스프와 신선한 샐러드를 즐기는 우아한 식성을 가졌다. 반면 나는 어떠한가. 달리기라는 취미를 가진 탓에 생존을 위해 저탄수 고단백 식단을 고집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새벽같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인간이라 식구들 중 누구보다 먼저 아침을 챙겨 먹는다. 게다가 체중 관리를 위해 거의 매일 간헐적 단식을 수행하고 있어 오후 4시가 넘어가면 물 외에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는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집사람은 딸아이의 영양 밸런스를 맞추고 본인의 취향까지 고려해 상을 차려야 하는데 여기에 까탈스러운/변덕스러운 나의 식성까지 맞추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우리는 각자 알아서 챙겨 먹는 시스템으로 굳어졌고 나는 자연스레 가정 내 식탁 생태계에서 마이너한 그룹으로 분류되어 음식의 밸런스가 무너진 지 오래였다. 내가 먹는 것은 요리가 아니라 그저 달리기 위한 연료 주입에 가까웠으니까.


그날 저녁 지인의 집에 초대된 우리 가족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상다리가 휘어질 듯한 푸짐한 상차림이었다. 야외 바베큐 그릴에서 갓 구워낸 양고기는 특유의 누린내를 기가 막히게 잡아내어 코끝을 자극했고 그 옆에는 달큰한 양파 소스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껍데기는 과자처럼 바삭하고 속살은 육즙을 가득 머금은 채 숯 향을 듬뿍 입은 오겹살이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기의 느끼함을 잡아줄 콩나물무침과 파절임 그리고 싱싱한 쌈 채소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날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들기름에 달달 볶아낸 갓김치였다. 알싸한 갓의 향과 고소한 들기름이 만나 입안에서 폭죽을 터뜨리는데 이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나 같은 토종 한국인의 입맛에 착착 감기는 것은 물론이요 유전자 깊숙한 곳에 새겨진 한식에 대한 갈망을 일깨워주는 몸에 좋은 보약과도 같았다.


음식만으로도 이미 엔돌핀이 차고 넘치는데 우리가 준비해 간 리즐링 와인이 곁들여지니 금상첨화였다. 적당한 산미가 침샘을 자극하고 은은한 단맛이 고기의 풍미를 끌어올려 주었다. 맛있는 음식과 술 그리고 좋은 사람들이 나누는 유쾌한 대화가 어우러지니 몸에는 충만한 에너지가 돌았고 영혼까지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저씨들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섞여 연말의 밤은 너무도 짧게 스쳐지나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의 공기는 훈훈했다. 운전대를 잡고 가족들에게 오늘 참 좋았지 않느냐며 운을 띄우니 뒷좌석에 앉은 딸 녀석은 친구와 그 동생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복기하며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조수석에 앉은 집사람은 그 집 그릇이며 커틀렛이 음식과 참 잘 어울리더라며 우리 집 그릇도 바꿀 때가 된 게 아닌가 하고 은근한 부러움을 내비쳤다.


나는 그 무엇보다 간만에 좋은 사람들과 만나 웃고 떠들며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는데 거기에 더해 평소 간헐적 단식으로 줄어든 위장의 용량을 거뜬히 오바해서 밀어 넣은 푸짐하고 맛있는 음식 덕분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나는 내일은 하루 종일 굶어도 되겠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배를 두드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몸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전날 섭취한 고칼로리 음식의 에너지가 혈관을 타고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며칠 동안이나 나의 입을 괴롭히던 혓바늘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많이 나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피로 누적으로만 생각했던 입병이 단 한 끼의 포식으로 호전되다니 인체의 신비란 참으로 오묘했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아침 운동을 나갔다. 평소 같으면 다리가 무거워질 구간에서도 뚜렷하게 힘이 나는 것을 느꼈다. 지면을 박차고 나가는 힘이 달랐다. 역시 탄수화물과 단백질이 몸속에 가득 차 있으니 엔진 출력이 달라지는구나 싶었다. 달리기를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집에 들어와 집사람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을 입 밖으로 뱉고 말았다. 역시 그동안 나 혼자 챙겨 먹은 음식의 밸런스가 좋지 않았나 봐. 어제 잘 먹고 나니까 혓바늘도 낫고 뛰는데 힘이 펄펄 나네. 여태껏 나 영양 부족이었나 봐.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집사람의 얼굴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말았다. 나는 그저 내 식단 관리의 허점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집사람의 귀에는 전혀 다른 뜻으로 들렸을 것이다. 남편 밥도 제대로 안 챙겨줘서 영양실조에 걸리게 만든 무심한 아내라는 비난으로 들렸으리라. 공기 중으로 흩어진 나의 망언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고 그날 집안 공기는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웠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살얼음판 같던 냉전기도 지나가고 어느 주말 집사람과 데이트도 할 겸 딸아이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라멘집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딸아이가 세상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주문을 받는 딸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무얼 주문하시겠어요 라는 딸의 명랑한 목소리에 집사람은 진한 국물의 돈코츠 라멘을 골랐고 나는 면과 국물을 따로 즐기는 쯔케멘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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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멘 위에는 두툼한 차슈가 올려져 있었다. 그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보니 자연스레 지난 연말 파티에서 먹었던 바베큐가 떠올랐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해맑게 집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이 차슈 보니까 그때 그 집에서 먹었던 오겹살 생각난다. 그 고기 진짜 맛있었는데 그치. 그러자 라멘 국물을 한 숟가락 뜨려던 집사람이 동작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 고기 이야기하니까 당신의 그 영양 부족이었나 봐 라는 말이 생각나네.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말이었어. 내가 아마 죽으면서도 그 말은 원한으로 가지고 갈 것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웬만한 부부 싸움에도 맛있는 음식만 먹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 단순하고 쿨한 집사람이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나의 말실수 하나에 몇 주간이나 마음속에 응어리를 품고 있었다니 사태의 심각성이 뒤늦게 뼈저리게 다가왔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아니 여보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절대 아니지. 내가 달리기 기록 단축하겠다고 유난 떨면서 체중 조절한답시고 적게 먹어서 그런 거야. 내 욕심 때문에 스스로를 굶긴 거지 당신이 안 챙겨준 게 아니잖아. 오해하지 마.


나는 호탕하게 웃으려 노력하며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해 여보. 원한까지 가질 줄은 몰랐어. 그렇게 섭섭하게 들렸는지 정말 몰랐네. 내 말주둥이가 문제지. 이제 그만 원한 풀고 이 맛있는 라멘 먹자 응.


집사람은 못 이기는 척 라멘을 먹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눈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나는 쯔케멘 면발을 국물에 적시며 생각했다.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라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차려 놓은 음식에 감사하고 주는 대로 먹으며 쓸데없는 말은 삼가야 한다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특히 아내 앞에서는 더더욱.


라멘을 먹는 내내 나는 차슈 한 점을 집어 들 때마다 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영양 실조가 아니다. 나는 그저 배고픈 러너일 뿐이다. 그리고 오늘 이 라멘은 정말 맛있다. 다행히 딸아이가 서비스라며 건네준 스프라이트 한 캔 덕분에 꽉 막힌 속이 조금은 뚫리는 것 같았다. 그래 사는 게 다 이런 거지. 맛있는 거 먹고 등 따습고 아내의 눈치만 잘 살피면 그것이 바로 평화로운 삶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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