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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Jun 22. 2021

인생의 두 장난꾼, 성공과 실패를 대하는 태도

책 읽어주는 시간.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하는 일과이다. 아이들이 먼저 잠들거나 내가 아프지 않은 이상, 동화나 그림책을 읽어주고 잠자리에 들게 한다. 작은 아이는 유치원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독서 통장을 기록하고 있다. 읽은 책의 제목을 기입해가면 백 권씩 읽을 때마다 독서상을 받는다. 큰 아이부터 작은 아이까지 함께 다닌 유치원 안에는 한편에 작은 문방구가 있다. 독서상이란 이 곳에서 소소하지만 마음에 드는 장난감을 아이들이 직접 두 개씩 고르는 것이다.


큰 아이는 독서상을 받는 것이나 책을 양적으로 많이 읽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다른 친구가 상을 받는 말든,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다가 피곤하면 금세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작은 아이는 작년 한 해 동안만 400권이 넘는 책을 독서 통장에 기록했다. 또래보다 키도 체구도 작지만 무언가를 잘 해내고자 하는 욕심은 태산 같은 아이다.


책을 읽은 권수가 백, 이백, 삼백에 다다를 때마다 아이는 상을 받고자 하는 불같은 마음이 이나보다. 아이는 독서통장을 제출하는 월요일이 다가오면 책장에서 뽑은 수십 권의 책들을 낑낑대며 들고 온다. 식탁에 앉아 쉬고 있는 내 앞에 책을 탁, 올려놓으며 "엄마, 이거 다 읽어 줘." 한다. 독서를 벼락치기로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군말 않고 소리 내어 읽어주기 시작한다. 동기야 어쨌든 자신이 해결해야 할 과제를 기억하고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기특해서이다. 아이는 책에 집중하다가도 "엄마, 독서상 받으려면 몇 권 더 읽어야 돼?", "이제 백 권 되려면 몇 권 남았어?" 하며 물어댄다. 그만큼 아이는 독서상을 받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책을 대충 읽거나 안 읽은 것을 읽었다고 속이지도 않았다.



문방구 장난감이라는 보상이 뒤따라서겠지만 아무튼 작은 아이는 차곡차곡 책을 읽어 백 권에 도달했다. 일곱 살이 되어 새로 받은 독서 통장에 당당히 백 번째 책을 기록한 일요일 밤. 아이는 월요일에 독서상 받을 것을 잔뜩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유치원에서 하원한 아이는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독서상으로 받은 장난감을 자랑하겠거니 했는데 가방 안은 비어 있었다.


"선생님이 아침에 SH 독서상 줄게 하셨는데 끝날 때까지 안 주셨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아이의 얼굴은 그래도 다음 날 주시겠거니 하는 기대감이 살짝 엿보였다. 그다지 우울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었으니 내일이면 주시겠지 뭐.' 하는 여유가 만면에 어려있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화요일인 다음 날에도 하원한 아이는 독서상을 받지 못했다. 아이는 서서히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같은 주간에 독서상을 받는 사람은 자기 혼자라고 했다.


"선생님이 독서상 안 주시면 어떡해? 나 혼자라서 잊어버리신 것 같아."

"선생님이 어제, 오늘 많이 바쁘셨나 봐. SH가 유치원 가서 선생님, 독서상 주세요!라고 말하면 바로 주실 거야."

나는 아이를 다독이며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이불 밖으로 얼굴만 내민 채 누워있었다.


"선생님이 오늘도 독서상 안 주시면?"

 

아이는 울먹이며 유치원을 가기 싫다고 했다. 선생님께 가서 상 달라고 한 마디 하면 될 일을 혼자 끙끙대고 있었다. 정한 날이면 예외 없이 독서상이 주어졌을 텐데 정작 아이 자신은 상을 받지 못하자 거절당하는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상 받을 자격이 있는 아이가 도리어 못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낯을 가리긴 하지만 평소에 자기가 해야 할 말은 분명하게 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 한 마디가 제삼자인 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겠다 싶었다.




한 달 동안 일하고서도 정해진 월급날에 돈이 지급되지 않았던 경험이 있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일을 했으니 정해진 날은 넘기지 마시고 꼭 월급을 넣어 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일 자체는 재미가 있으니, 원하던 일을 하고 있으니 하며 위안 삼고 기다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일을 하면 제 때에 월급을 받는, 너무나 당연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 마음이 쪼그라들다 보면 나 자신 자체가 거절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결과적으로 일어난 상황이 나의 부족함과 능력 없음에 기인한다고 자책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의 경영 상황이 어렵고 힘들었을 뿐이었다.


거절감을 느낀 마음에는 상처라는 자국이 남는다. 열심히 노력했는데 기대했던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패배감을 느낀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아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자연스레 나 자신을 비하할 뿐만 아니라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을 함께 비하하기도 한다. 아이는 수요일이 지나도록 독서상을 받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여전히 선생님께는 상을 달라고 말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노파심에, 아이가 행여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선생님을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까 봐 나는 바로 유치원에 연락을 드렸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생겼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이 사정상 바뀌신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갑작스레 일을 그만두시게 되면서 정신이 없으셨던 것 같다. 매일 아침마다 아이를 만나면 "우리 SH, 독서상 받아야지!" 말씀해놓으시곤 오후가 되면 잊어버리셨다고, 너무 죄송하다고 솔직하게 얘기해주셨다. 아이의 애간장을 녹인 독서상 선물은 결국 한 주가 지나고 새로운 담임 선생님이 오신 뒤에야 받을 수 있었다. 아이가 유치원 문방구에서 고른 장난감은 물풍선 한 봉지와 버튼을 눌러 고리를 거는 손바닥만 한 게임기. 유치원에서 선물을 고르는 시간만큼은 순간일지라도 행복했을 것이다. 물론 며칠이 지나자 아이는 그것들을 잘 갖고 놀지도 않았다. 이걸 못 받을까 봐 그토록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바라고 원하는 바를 이루면 흔히 '성공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성공이 계획대로 노력한다고 해서 바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황과 환경이라는, 우리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결과적으로 상을 받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서 그 시기가 늦춰지는 경험을 했다.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아이가 며칠간 맛봤을 기분이나 감정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사실 아이는 그동안 나와 함께 책을 읽으며 과정 중에 얻은 수확이 더 많다. 아이는 과거와 미래, 동서양을 넘나드는 동화 속 이야기를 통해 다채로운 인생사를 만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마음과 감정을 읽으며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배웠을 것이다. "왜?"라는 질문은 또 왜 그리 많이 하던지. 나는 알고 있어도 아이에겐 새로운 궁금증들이 책이라는 산등성이를 함께 넘을 때마다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동 반사적으로 나왔던 아이의 "왜?". 인생이라는 책장을 엄마 없이 스스로 넘길 때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묻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면의 질문을 무시한 채, 세상이 재단한 성공이라는 한 길만을 위해 내달리는 아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독서 통장을 기록하며 작은 성취를 맛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에 연연하기보단 열린 마음으로 책 속 이야기를 만나고, 그 과정 중에 기쁨을 누렸으면 한다.



'정글북'을 쓴 영국의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열 두 살 된 자신의 아들, 존을 위해 '만약에(If)'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와 아름다운 수채화가 함께 담긴 그림책을 며칠 전, 아이와 읽었다.



만약에
(러디어드 키플링, 살림어린이)

.

.

기다림 속에서도 기다림에 지치지 않고

거짓이 다가와도 거짓으로 대하지 않고

미움을 받더라도 미움에 굴하지 않으며

나를 내세우거나

현명한 척을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꿈을 간직하되 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생각을 계속하되

생각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승리와 패배가 다가와도

이 두 장난꾼을 똑같이 대할 수 있다면

.

.

네가 최선을 다하여 이뤄낸 것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몸을 굽혀 낡은 연장을 들어 다시 짓기 시작할 수 있다면

.

.

가차 없이 다가오는 1분의 시간을

최선을 다하여 60초의

장거리 달리기로 채울 수 있다면


그러면 온 세상과 세상 모든 것이

다 너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네가 진정한 인간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의 아들아.          


그림책의 시를 읽어주자 아이는 대체 뭔 말이야,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뭉클해졌다. 특히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를 두 장난꾼에 비유하다니. 인생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가 참 유쾌하고 여유로웠다.


원하는 바를 손에 쥐었다고 우월감에 빠지거나 자만할 수 없다. 반대로 나의 노력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 빠져나가듯 실패감을 느낄 때에도 자기 연민이나 비관에 빠질 필요가 다. 성공이든 실패든 영원히 그대로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시인의 말처럼 성공과 실패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장난꾼처럼 가볍게 바라보는 태도도 필요하다. 그래서 그것들에 함몰되지 않고 나 자신을 변함없이 성장시켜 나갈 수 있다면. 내가 선택한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그 과정 자체를 향유할 수 있다면. 나도 아이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가끔은 이렇게 반짝이는 인생의 비밀을 아이가 보는 그림책 속에서 발견할 때가 있다. 독서 통장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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