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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Apr 13. 2023

공짜 유칼립투스

아름다운 향기를 좇으며 살기

종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내 손에는 늘 어떤 냄새가 배어 있다. 냉장고 속 반찬 냄새가, 설거지나 배수구 청소 후 손가락 마디마다 옮겨 붙은 고무장갑 냄새가, 세탁기에 넣을 옷가지를 만질 때마다 찌든 땀 냄새가. 핸드크림을 수시로 바르는 이유는 건조한 손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집안 일로 배인 냄새를 잠시나마 차단하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화병에 꽃을 꽂기 시작한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의 경우 꽃은 눈으로 보며 즐기는 기쁨도 크지만 손으로 매만지며 누리는 행복이 더 크다. 꽃줄기를 다듬고 여린 꽃잎들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두 손 가득 싱그러운 향이 묻어나 생기를 얻곤 한다.



얼마 전, 거실에 화병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이전에는 식탁 위에 화병을 올려두었다. 하지만 식탁 위는 화병을 놓을 제 자리가 아니었다. 혼밥이라면 모를까, 가족이 함께 식사할 때면 밥과 국그릇, 끼니마다 오르는 반찬 접시만으로도 식탁이 꽉 차서 화병은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좋아하고 아끼던 꽃이 애물단지 신세가 되는 것 같아 속상했다.



2단으로 된 조립식 선반을 구매해 맨 꼭대기 층을 비워두었다. 드디어 꽃을 위한 지정석이 생긴 것이다.  화병처럼 제 자리가 없어, 늘 소파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던 도서관 대여 책도 선반 맨 아래층에 꽂아두기 시작했다.   



작은 공간이지만 꽃을 위해 고유한 자리를 만들어두자, 그곳에는 계속 꽃만 놓게 된다. 항상 바라보게 되며 더욱 관심을 갖게 다. 꽃이 피었다 지는 모양, 마침내 시들고 서서히 잠드는 모습까지 하나하나 놓치지 않게 된다.   



어둑한 저녁,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지만 작은 아이와 함께 밖을 나섰다. 종이접기 덕후인 아이는 색종이가 똑 떨어져 울상이었고 나는 빈 틈과 환기가 필요한 마음이었다. 문구점 바로 옆에 꽃가게도 있으니 색종이를 사 오는 길에 봄꽃 한 다발 둘둘 말아 집에 돌아오자고 마음을 먹었다.



꽃집에 가면 가능한 낯선 이름의 꽃을 고른다. 새로운 친구와 첫인사를 하듯 유리 화병에 볼펜으로 적힌 생소한 이름을 먼저 읽어본다. 어떤 향을 가진 꽃일지 설레는 마음으로. 천사 같은 꽃집 사장님은 내가 갈 때마다 두어 송이 꽃을 더 얹어 포장해 주시곤 했다. 분홍색 꼬마 장미 한 단을 사면, 송이가 큰 같은 색 장미꽃 한 송이를 그냥 주시는 식으로. 꽃가격이 만만치 않아 한 가지 종류의 꽃만 사면, 팔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잎이 상하지도 않은 작은 꽃들을 함께 주실 때도 있다. 감사하면서도 죄송한 마음에 나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데요?"라고 말했고, 사장님은 꽃처럼 예쁜 함박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도 두 가지 종류의 꽃을 두 대씩 고르자, 사장님은 유칼립투스 대여섯 줄기를 자연스레 더해주신다.     



"꽃바구니에 꽂으려고 했던 거라 줄기가 다 짧아요."

"낮은 화병도 있어서 높이가 맞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유칼립투스를 너무 많이 주셔서, 캄파눌라로 불리는 초롱꽃 한 대를 더 골라 계산대 위에 놓았다. 그러고 보니 사장님과 나 사이에 꽃바구니가 놓여있었다. 아직 듬성듬성 꽂혀있었지만 노란색 계열의 봄꽃들이 서로 잘 어우러져 화사했다. 계산을 하고 나서, 나는 "꽃바구니 색감이 정말 예뻐요!"라고 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 무언가 좋아하는 마음을 알아봐 주신 사장님에게 나도 화답하고 싶었다. 사장님도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을 계속 간직하며 꽃과 함께하는 일터의 삶을 잘 꾸려가시길. 응원하고 싶었다.



무언가 좋아하는 마음을 계속 간직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어른이 되고 보니, 그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는 것도 깨달았다. 화병을 놓기 위한 자리를 쉽게 만들고도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켜줄 수 있을지 나는 기약할 수 없다. 삶은 짓궂은 조향사라서, 매일 상쾌하고 싱그러운 향만 맡으며 살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상의 아름다운 향기를 분별해 내고 그것을 좇으며 살고 싶다.  좋아하는 대상을 위해 몰두하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삶의 향기는 가장 아름답게 고이고 은은히 퍼져나갈 것이다.



집에 돌아와 신문지에 싸인 꽃들을 풀어놓자마자 코를 파묻었다. 유칼립투스의 향이 언뜻 레몬과 파스를 생각나게 했다. 상큼하고 시원한, 알싸한 향. 서로 높낮이를 맞추어 줄기를 조금 자르고 화병에 꽂는 동안 양손 가득 유칼립투스 특유의 향이 묻어났다. 그 향이 진하고 진정 효과에도 좋아서 허브 차나 오일로도 쓰인다지. 모기 퇴치에도 좋다는데 한여름, 아이들 자는 방에 유칼립투스 잎을 놓아두어도 좋겠다. 아직 저 멀리서 늦장 부리는 여름이 유칼립투스 향에 취해 성큼 다가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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