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큰 아이가 열감기를 앓은 탓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침이 되어 열은 내렸지만 통증을 견뎌내느라 아이의 얼굴은 새까맣게 타 보였다. 월요일이었지만 학교를 쉬게 하고는 나는 곧장 집을 나섰다. 신열을 이긴 아이에게 뭐라도 먹이고픈 작은 마음이 파도가 되어 요동쳤다.
무슨 죽을 먹일까, 4월인데 신선한 딸기가 있을까, 아이가 죽을 먹으면 나는 점심으로 무얼 먹지 등등의 생각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아파트 단지 안을 걸었다.
"저쪽 꽃들이 더 몽실몽실 피었네요!"
잠시 뒤, 귓가를 스치는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놀이터 쪽에 관리실 직원 분이 계셨다. 전동 휠체어를 타신 할아버지 한 분과 대화를 하시던 모양이었다. 관리실 아저씨와 두런두런 몇 마디를 주고받으시는 할아버지 표정이 밝으셨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고 벚꽃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몽실몽실, 가지마다 벚꽃들이 송이송이 피었다. 이틀 전만 해도 동그스름한 진분홍 꽃망울만 맺혀있을 뿐이었는데. 주말을 보내는 사이, 숨어 있던 꽃잎들이 거짓말처럼 모두 얼굴을 내밀었다. 미세먼지로 며칠 째 탁하던 하늘도 오랜만에 제 빛을 보여주었고. 맑은 하늘 아래 만개한 벚꽃을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그늘진 마음에 볕을 쬐어주는 일이었다.
가지마다 기적이 매달려있다고 생각했다. 무얼 믿고 저 작은 생명들은 가지 밖으로 몸을 내밀었을까. 겨울 내내 막연히 기다리던 장면을 막상 맞닥뜨리고 보니, 마음이 한없이 조심스러워진다.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충만하나 위태롭다. 그러니 존재만으로도 하나의 노래가 되고, 꿈을 꾸기 충분하며, 사랑받아야 할 온전한 자격이 된다.
삼십 여분쯤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김없이 양손 가득 짐이다. 혼자 집에 있을 아이 생각에 벚꽃이 흐드러졌어도 발걸음을 늦출 수가 없었다. 파란 하늘과 연하고 순한 빛깔의 벚꽃. 하나의 풍경으로 포개진 둘의 사이만큼 나도 누군가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얀 스케치북에 톡톡, 물을 가득 머금은 붓으로 눈앞의 풍경을 따라 그리고픈 마음이 일었다. 어찌할 도리없이, 그 상태로 보도블록 위에 장바구니를 툭 내려놓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진으로나마 담아두기 위해서였다.
위에서 아래로,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휴대폰을 움직이며 풍경을 고정시켰다. 그때 카메라 속에 장을 보러 가던 길의 할아버지 모습이 담겼다. 눈앞의 휴대폰을 거두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멀찍이 떨어져 계신 할아버지와 그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떤 인기척도, 소리도, 움직임도 없이. 다만 할아버지 앞의 벚꽃나무 가지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몰라 할아버지께 몇 발자국 더 가까이 가보았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계셨다. 낮잠에 빠져드신 것 같기도, 잠잠히 눈을 감고 일광욕 중이신 것 같기도 했다. 분명 이 시간을 오롯이 즐기고 계셨다. 짙은 네이비색 패딩에 야구 모자, 그리고 겉옷과 비슷한 색상의 무릎 담요가 포근해 보였다.
허락도 없이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와 벚꽃 나무를 멀리서 사진에 담았다. 파란 하늘과 벚꽃처럼 그 자체로 완전한 풍경이었다. 나는 처음 뵈었을지라도 오래된 벚꽃 나무는 할아버지를 알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매년 이맘 때면 어김없이 피고 지는 벚꽃이 할아버지에게 편안한 친구처럼 보였다. 벚꽃은 홀로 고고하게 피어나는 화려한 꽃이 아니다. 몽실몽실, 송이송이 한 나무에서 함께 피는 꽃이었다. 제 모습처럼 서로에게 벗이 되어주라고, 벚꽃인가 보다.
다시 장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의 마음이 조금 쓸쓸하지 않을까. 오늘만큼은 한 뼘 더 가까이, 아이 곁으로 다가가리라. 그 마음이 외롭지 않도록 엄마이자 좋은 벗이 되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