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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Feb 03. 2023

모퉁이에 놓인 기쁨

카이로스의 시간 갖기

아이들이 방학 중이다. 이번 겨울 방학은 무려 70여 일. 학교에 공사가 필요한 탓에 방학 기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점심 즈음, 주방에서 서성이는 내게 큰아이가 쪼르르 다가와 묻는다.


"엄마, 오늘 점심 메뉴는 뭐예요?"


직장인의 점심시간이란 하루의 기쁨이 응축된 시간이다. 아이들 역시 학기 중엔 점심 급식 시간을 가장 고대했을 것이고. 방학을 시작한 이상 아이들의 기대감은 학교 급식에서 집밥으로 옮겨졌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기대하는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 눈빛을 피할 길 없이 나는 곧장 점심 준비를 시작한다. 십 년 가까이 반복했지만 여전히 막막하고 가끔은 외롭기도 한 작업이다.  



오후 1시 반. 무사히 끼니를 해결하고 나면 아이들이 학원에 갈 채비를 한다. 돌아오기까지 한 시간 남짓. 오전 내내 직선으로 달리던 시간도 이때쯤이면 모퉁이 한 번을 돈다. 나는 이 모퉁이 곁에 잠시 안착하여 나만의 시간을 누리기로 작정한다.



아이들이 현관문을 나서자 점심 설거지를 빠르게 마치고 커피부터 내렸다. 포트에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기다리며 커피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나는 주로 오른손잡이인데 원두를 갈 때만큼은 왼손만 쓰게 된다. 커피 그라인더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데 오른손으로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신기한 일이다. 다 된 밥을 주걱으로 퍼올릴 때나 수세미로 접시를 닦을 때,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릴 때처럼 집안일에는 주로 오른손이 쓰이곤 하는데. 평소에 줄곧 쓰이지 않는 왼손이 그 존재감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커피 내리는 시간이 특별해진다.



치직, 치지직-. 90도쯤으로 맞춘 물을 드리퍼 위에 부으면 소리가 난다. 데워진 물이 적당히 부서진 원두와 맞부딪히다 이내 그 틈새로 흘러들어 갈 때, 작지만 좋은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지직대는 소리가 잃어버린 주파수를 찾는 중인 낡은 라디오 소리 같다. 관심을 갖고 집중해야 들리는 아주 작은 소리. 소리에도 귀 기울일 수 있는 순간이 하루에 몇 번이나 될까.



위에서 아래로, 원두를 타고 내려간 물이 또르르 또르르 유리잔을 채우기 시작한다. 하루 전에 구입한 케냐 AA의 향이 코 끝으로 들어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하다. 만일 커피에서 아무 향도 나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처럼 그것을 좋아할 수 없었겠지.



그러고 보면 향기가 나는 모든 것들은 대개 부피를 지닌다. 모양도, 크기도 다르지만 저마다 타고난 깊이가 있다. 사람은 물건처럼 단번에 그 속을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내면의 깊이를 더해갈 수 있다는 것. 이와 같은 가능성이 바로 사람에게 있고, 나에게도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부푼다. 세월이 흐르는 만큼 깊어지는 사람. 그 보이지 않는 깊이에서부터 좋은 향기를 내뿜는 사람이 되는 것. 요즘의 내가 꿈꾸는 미래다.



마침 거실에 놓인 블루투스 스피커에서는 키스 자렛의 오래된 연주곡이 흐르며 적요한 공간을 채웠다. 좋아하는 커피와 음악으로 스스로를 충전하고 있으니 마음은 자연스레 글쓰기로 향했다. 고르게 비질해 놓은 앞마당처럼 이전보다 정돈된 마음으로.



글을 쓰는 시간은 아이들만 바라보던 시선이 비로소 나에게로 향하는 시간이다. 아이들의 입맛에 맞춘 식단과 방학을 잘 보낼 묘수 같은 것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물이 커피가 되어가며 그 색과 향을 생성하듯 흐릿했던 내가 온전한 '나'로서 뚜렷해지는 시간. 시간이 쏜살처럼 수평으로 흐르다가 깊이로 흐르는 시간. 쌓이고 쌓이면 내면과 세계가 확장되는 시간.  이런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이라고 말하나 보다.



내가 '나'라는 것을 실감할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서서히 차오른다. 시간의 모퉁이에 놓인, 나만이 알 수 있는 작은 기쁨들이. 다시 이 모퉁이를 돌아나가면 남은 하루를 더욱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 테다. 아이들이 곧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면 이전보다 커진 품으로 맞이할 수 있을 테다. 



마시다 남은 커피는 금세 차가워졌지만 그 향기만큼은 여전히 진했다.






°카이로스(Kairos):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기회의 신'이름.'카이로스의 시간'은 상대적인 시간, 의식적으로 보낸 시간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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