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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Dec 14. 2022

달력을 바라보는 마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연말이면 달력을 모으는 일이 중요했다. 방마다 걸어놓을 종이 달력은 물론이고 책상이나 화장대 위에 탁상용 달력을 놓는 일은 새해를 시작하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보기 좋은 달력이 많이 모이면 할머니나 엄마는 새로운 세간이 들어온 것처럼 좋아하셨다. 인쇄용 달력의 유효기간은 기껏해야 일 년뿐인데도 말이다. 반대로 새해가 다가와도 달력이 모이지 않으면 엄마는 동네 농협이나 보험회사 같은 곳에서 몇 개 더 받아낼 궁리를 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방에는 하루에 한 장씩 뜯어내야 하는 달력이 있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달력의 시간은 자주 멈춰있곤 했다. 그 종이 달력의 숫자가 바뀌지 않는 모습만큼 어색한 일이 없었다. 큼직하게 숫자가 박혀있고 얇은 습자지로 된 그것 말끔하게 뜯어내야 기분도 좋았다. 뜯어내고 뜯어내다 연말쯤 되면 두툼했던 달력이 눈에 띄게 얇아졌다. 그것을 알아챘을 때 나는 또 아쉬워했다. 그동안 강박처럼 뜯어낸 시간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하고.   



어느새 12월을 살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에도 거실과 주방 사이, 누구든지 가장 잘 보이는 벽에 달력을 걸어두었다. 어릴 적 하루에 한 장씩 뜯어내던 종이 달력과는 달리, 이 달력은 한 달치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원목 달력이다. 작은 아이가 유치원 입학할 때 받았던 선물인데 몇 년째 요긴하게 쓰고 있다. 평일은 검은색, 휴일은 빨간색 잉크로 새겨진 숫자가 네모난 나무 조각 위에 또렷하다. 요즘이야 시간 가는 것을 스마트폰 하나로 다 읽어낼 수 있기에 인쇄용 달력이 살아가는 데 필수품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달력을 제자리에서 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매 달 바뀌는 숫자의 자리를 찾아줄 때마다 손끝으로부터 시간의 유한함을 감지해내기 때문일 것이다.



성탄절과 연말, 그리고 작은 아이의 생일 덕분에 12월은 내게 특별한 달이다. 아이의 생일 전날, 나는 아이에게 필요할만한 선물을 준비했다. 평소에 갖고 싶다던 큐브와 손목시계였다. 그날 밤, 아이는 내게 말했다. 엄마, 나는 더 큰 선물이 받고 싶은데. 형을 통해서 대강 엄마의 선물을 짐작한 아이는 들뜬 마음이 앞서서인지 거침없이 그 속내를 드러냈다.



"엄마는 네가 태어날 때 배가 아주 많이 아팠어. 엄마가 힘들게 너를 낳았는데, 선물은 엄마가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일부러 서운한 척하며 말했다. 그런데 아이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엄마, 나는 나오느라고 더 힘들었다고!"


장난스럽게 내 말을 받아치는 아이의 말과 억양, 익살스러운 그 표정에 나는 그만 깔깔 웃고 말았다. 그 말이 웃겼던지 큰 아이도 침대 위를 데굴거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모습이 또 우스워서 우리는 한참을 웃어댔다. '힘들다'는 말을 이렇게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나도, 아이도 힘들었던 그때의 기억은 새까맣게 잊은 지 오래다.



아이는 태아였을 때 배에 복수가 차고 간에 이상 징후가 있어 이런저런 검사를 많이 받았다. 아이가 어떤 상태인지 낳아봐야 알 수 있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이 그때는 참 무기력하게 들렸다. 불확실한 미래에 온갖 상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아이를 건강하게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더라도 잘 키울 것이라고 수없이 되뇌곤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잊은 채 살고 있다. 나는 아이를 잉태했고, 당시의 내게 힘들게만 느껴졌던 시간도 무엇인가 생명처럼 잉태하고 있었다.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 가늠조차 할 수 없고 피부에 와닿지 않는 '소망'이라는 것. 그것은 언제쯤 태어났는지 지금, 우리의 시간 속에서 다시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천천히 자라 가고 있다.



새로운 달, 달력을 맞추며 이미 손에 쥐고 있으나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조각들을 매만진다. 또각또각. 나무 조각을 이리저리 옮기고 끼울 때마다 부딪히는 소리가 깨끗하고 맑다. 달력을 바라보며 누군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고. 시간은 종이처럼 뜯어낸다고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겹겹이 채워지고 모여서 저마다 다른 삶의 모양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달력을 바라보는 마음이 애틋해졌다. 11월의 끄트머리에서 어떤 큰 상실감으로 마음은 텅 빈 채였다. 찬바람마저 일던 마음이 다시금 달력을 바라본다. 때론 피하고 싶은 모습일지라도 삶을 사랑할 것. 시간과 함께 그것이 어떤 모양을 빚어낼지 기대할 것. 시간이 품고 있어 보이지 않는 생명, 소망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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