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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Apr 20. 2023

날씨와 나의 티키타카

오후가 되자 날이 개었다. 베란다 난간에 생겼던 빗방울 눈금이 마르고, 건물 사이로 볕이 파고들어 선명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비가 오다, 흐렸다, 마침내 맑아지는 하루. 결말이 마음에 드는 단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마음도 개인다.



늦은 오후였지만 새 아침을 맞은 기분이었다. 물결이 보이나 싶을 만큼 잔잔하게 흘러가던 하루. 날씨의 반전이 일상의 물결을 크게 한 번 출렁이게 한다.



마침 두 아이들이 태권도 학원에 간 시간. 여느 때 같으면 집에서 밥을 먹고 있을 저녁 시간이었다. 태권도 수업이 뒷 타임으로 갈수록 재밌다는 아이들 말에 아리송한 생각은 들었지만 흔쾌히 보내주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밥을 먹였으니 단축 근무를 한 셈이다. 보통은 분주했을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해가 길어져  저녁임에도 사위가 밝았다.



파도를 타고 서핑하듯 맑게 개인 날씨의 흐름을 타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비가 오면 하기 힘든 일이 자전거 타기 아니던가. 날씨와 나의 °티키타카. 이 정도면 꽤 호흡이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적엔, 날씨에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성격인 것이 스스로 못마땅했다. 주변의 밝고 어두움, 떠도는 공기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런 것들에 상관없이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 자신의 삶에 집중하며 사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더더 어렸을 적엔, 어른들의 기분과 집 안 분위기를 먼저 의식하는 아이, 타인의 시선과 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가 나였다. 눈치를 보지 않았어도, 더 무모했어도, 마음에 고인 말을 좀 더 입 밖에 내었어도 좋았을 거라고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



그런 아이여서 한낱 지나가는 바람이나 비, 초여름의 풀들, 해질녘의 노을 같은 것에 마음을 잘 빼앗기곤 했다. 세상과 어른들은 그다지 관심 없어 보이는 것들, 작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에 나는 왜 온 마음이 동요되는지.



유년 시절, 집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이 있었고 그곳은 계절과 날씨의 모든 빛깔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날도 매일같이 놀던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들판으로 나갔다. 논 끝에는 못이 있었는데 물의 빛깔이 거무스르하고 탁해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못 주변에 서서 한참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한 번 뛰어들어 볼까?"

내가 친구들에게 물었다.


"빠지면 우리 죽는 거 아니야?"

"......"



울상을 지으며 되묻던 친구의 얼굴을 보며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던 기억은 지금껏 꽤 강렬히 남아있다. 그때의 나는 열 살도 채 되지 않았지만 늘 어떤 질문을 품고 있었다. 어른의 말로 요약하자면 이것이다.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실제로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하늘을 바라보거나, 들길을 걸을 때마다 같은 질문이 내 안의 깊은 곳에서 둥실둥실 떠오르곤 했다.



어린아이의 감정이라고 덜 자랐을 리 만무하다. 사람의 감정은 태어나면서부터 완전한 법. 어쩌면 사람보다 편하게 느꼈던 자연의 품에서 나는 철학을 배웠고 누구에게도 잘 내비치지 않았던 감정의 속빛깔을 숨김없이 드러냈던 것 같다. 얌전하고 고분고분했던 아이가 돌연 못 속에 뛰어들 마음을 가졌다니. 단순한 장난이나 호기심만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품었던 나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은 매일 마주하는 변화무쌍한 날씨와 자연이 내게 던져준, 씨앗 같은 것이었다.



'카페 스페이스', '르블랑 플라워', '야끼화로'... 도로 옆 자전거 길을 달리며 상가의 가게들 이름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이전에도 몇 번 가보지 않았는데 벌써 간판 이름을 바꾸고 리모델링 중인 카페, 자리 잡은 지 몇 개월이 지났는데 여전히 들어가 보지 못한 꽃 가게, 늘 지나다니며 숯불 냄새만 맡았던 꽤 오래된 고깃집.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휘휘 도는 데 가본 곳보다 가보지 않은 가게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필요에 맞추어 가던 곳만 가며 주변의 변화에 잘 신경 쓰지 않는, 나는 이제 무덤덤한 어른이 되었다.



자전거를 바깥에 세워두고 한동안 들리지 않았던 빵가게로 들어갔다. 이사오던 해, 이곳에서 맛본 빵이 정말 맛있어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오겠다 장담했는데. 사람의 결심이란 얼마나 빨리 잊히는지. 쉽게 뒤바뀌는 내 마음이 오늘의 날씨를 꼭 닮았다. 



치아바타와 호밀 식빵, 머핀을 각각 한 봉지씩 집어 자전거에 실었다. 힘껏 페달을 밟으며 달릴 때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사방에 폴폴 흩어졌다.





°티키타카(tiqui-taca): 스페인어로 탁구공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뜻한다. 짧은 패스를 빠르게 주고받는 축구 경기 전술을 말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사람들 사이에 잘 맞아 빠르게 주고받는 대화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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