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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맛, 무반죽 빵

by 혜일

밤 사이 쌓인 어둠이 깨끗이 사라진 아침. 빵 구울 시간에 맞춰 서둘러 일어났다. 해 뜨는 시간이 날마다 당겨지는 걸 보며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겨울보다 몸을 움직이는 일이 한결 가벼워지는 봄. 주변의 어둠을 핑계로 이불처럼 둘둘 말고 있던 무기력도 툴툴 털어버린다. 하루 전,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빵 반죽을 꺼내었다. 꼬박 18시간이 지난 후였다.



빵의 이름은 '세상 쉬운 무반죽 빵'. 하다앳홈님의 베이킹 영상을 보다가 이 썸네일 제목에 이끌려 직접 만들어보게 되었다. 여기서 무반죽 빵(No knead bread)이란 반죽기를 사용하거나 치대는 과정 없이도 만들 수 있는 빵을 의미한다. 무반죽법은 미국의 셰프 짐 레이(Jim Lahey)가 대중화시켜 알려졌다고 한다. 재료를 섞는 정도만으로도 쉽게 빵을 만들 수 있으니 나와 같은 베이킹 초보에겐 눈이 번쩍 뜨이는 방법이다.



'세상 쉬운 무반죽 빵'에는 들어가는 재료도 비교적 간단했다. 귀리를 가열하고 압착해서 만든다는 롤드오트만 새로 준비했다. 롤드오트는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혈당과 콜레스테롤을 조절해 주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이전에는 잘 몰랐던 새로운 식재료를 알아가는 것도 베이킹의 소소한 재미다. 빵 반죽은 이전 날 아이들이 등교한 후 곧바로 시작했다. 미지근한 물에 꿀(또는 메이플시럽)과 이스트를 넣고 강력분과 소금, 롤드오트와 다진 견과류를 더하여 쓱쓱 섞으면 끝. 빵의 이름 그대로 재료 준비도, 만드는 과정도 세상 쉬웠다.



빵이 완성되기까지 이제 더할 것은 기다림의 시간. 힘들게 치대지 않아도, 두 손 잔뜩 밀가루를 묻혀가며 성형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지만 얼마간의 발효 시간이 꼭 필요했다. 반죽한 그대로 유리볼 위에 뚜껑만 덮어 상온에서 서너 시간을 두었다. 시간이 지나, 반죽은 두 배로 부풀고. 바닥 근처에 보그르르 기포가 올라왔다. 여기서 곧바로 오븐에 넣어 굽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또 한 번의 인내가 필요한 시점. 이제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최소 12시간 이상 발효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내일 먹을 빵을 위해 오늘을 기다리는 기분이 좋았다. 냉장고 가장 윗자리에 빵 반죽 그릇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바통이 내게서 시간으로 옮겨진 느낌이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뿌듯함과 든든함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작은 일이라도 내 몫의 과정을 성실히 마친 뒤에는 기쁨이 따라온다. 어떤 빵이 나올지 내심 기대하며 하루를 기다렸다.





이전 날 상온에서 두 배로 부풀었던 반죽은 다시 절반 높이로 가라앉아 있었다. 밤 사이 수축하고 밀착된 반죽은 옅은 노란빛을 띠었다. 그 수수한 모습 그대로 오븐 팬에 올려둔 채 덧밀가루를 뿌리고 모양만 조금 매만졌다. 한 시간을 더 기다린 후, 오븐 안에 빵 반죽을 넣었다. 집 안으로 반죽 빛깔과 닮은 아침 볕이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빵을 기다리는 동안 자연스레 여러 얼굴이 떠올랐다. 빵 한 덩이를 조각조각 나누어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픈 마음이 나도 모르게 솟구쳐 오르는 것이었다. 치아바타를 만들어 와 보라는 언니, 어느 지역의 무화과 깜빠뉴가 가장 맛있다는 제부, 소시지빵을 좋아한다는 아이 친구 엄마... 지난겨울, 어설픈 솜씨로 만든 내 빵을 한 번씩 먹어 본 이들은 후속 주문까지 놓치지 않았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머지않아 주문받은 빵들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생활의 여유란 단순히 물질적인 여유만을 뜻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빵 하나를 만들면서도 생활의 여유는 얼마든지 늘어난다. 빵을 만들기 위해 조금씩 확보해 낸 시간의 공백이 심리적 안정감을 더하며 나 자신을 여유롭게 만든다. 내 안의 여유는 작은 것이라도 누군가와 나누고픈 마음으로 이어진다. 내게만 향하던 시선이 타인에게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빵을 만들기 시작하며 이런 근사한 경험까지 하게 될 줄이야.



'땡!'


높고 맑게 울리는 오븐 소리와 함께 빵이 완성되었다. 견과류가 가득 들어간 빵은 밀도가 높고 묵직했다. 여기에 커피 한 잔과 샐러드, 과일을 곁들인다면 한 끼 식사로 손색없을 것이다. 갓 구운 빵 맛이야 말해 뭐 할까. 무반죽 빵은 내 손보다는 시간이 만들어낸 빵. 그러니 그 맛은 기다림의 맛일 것이다. 당신에게도 빵 한 조각 건네며 그 맛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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