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버는 일보다 아끼는 일에 더 신경을 쓰는 사이, 나는 지역 도서관과 친해졌다. 아이들 책은 구매하는 일이 거의 없고 도서관에서 대여해 본다. 요즘, 둘째 아이는 한글을 뗐고 나도 다시 운전을 배우며 초보 딱지를 떼려고 노력 중이다. 아이가 혼자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지역 도서관들을 투어 할 이유가 더욱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동네 도서관의 웬만큼 인기 있는 책들은 대부분 대여중이다. 그런데 동네를 조금 벗어나 산 중턱쯤 자리하고 있는 지역 도서관을 방문하면 그 인기 있는 책들이 그대로 꽂혀있는 경우가 많다. 가족 모두 회원 카드를 만들어 이 도서관에서 스무 권, 저 도서관에서 스무 권. 양껏 책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도서관 투어의 큰 장점이다. 물론 아이들 책뿐만 아니라, 어른인 내가 찾는 책도 겉장 한 번 펴지지 않은 새 책 상태로 꽂혀 있을 때가 많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도서관 투어는 꿈도 꾸지 못했다. 운전할 차도 없었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도서관에 머무는 것도 무리였다. 그렇다고 집 안 가득 아이들이 볼만한 책을 꽂아주지도 못했다. 큰 아이가 다섯 살, 작은 아이가 세 살.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집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해질 무렵, 아파트 현관 철문을 누군가 콩콩 두드렸다. 당시 살던 아파트는 밖에 서 있는 손님을 확인할만한 인터폰이 없었다. "누구세요?" 하며 문을 연 순간, 큰 배낭을 멘 아주머니 한 분이 "아랫집에서 이야기 듣고 왔는데요, 아이들 책 좀 소개해 줄게요. 커피 한 잔만 줘요." 하시며 불쑥 집 안으로 발을 들여놓으셨다. 마치 내게 맡겨 놓은 커피가 있는 것처럼, 전부터 나를 알고 있다는 듯이.
당황스러워 머뭇거리는 사이, 아주머니는 배낭 안에서 동화책들을 꺼내 펼쳐놓기 시작하셨다.
"아이고, 아이들이 너무 예뻐요. 할머니가 이 책 읽어 줄까?"
아이들은 할머니 연배 비슷한 아주머니가 반색하자, 활짝 마음을 열며 몸을 들썩였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몇 번 얼굴을 뵌 분이었다. 아주머니는 아이들이 많이 살고 있던 당시의 아파트 단지를 자주 방문하시며 어린이 책 전집을 파시던 분이었다. 나는 마음이 조금 열려 아주머니께 믹스 커피 한 잔을 내어드렸다.
그분은 커피를 홀짝이며 우리 집 거실 책장을 쫙 훑어보시더니, "아이고, 애들 읽을 책이 너무 없네!" 하며 탄식하셨다. 이 책 아주머니의 연이은 '아이고'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분은 책 판매에 달인이자 프로였다. 나는 점차 그분의 이야기에 빨려 들기 시작했다.
나: 거실이 좁아서 책장을 많이 놓을 수가 없어서요.
아주머니: 우리 딸도 집이 20평이 안되는데, 그냥 벽 한 면이 다 책장이에요. 집 좁다는 건 핑계예요, 핑계!
나: 저는 전집을 한꺼번에 구매해서 보여주기보다는 도서관을 방문해서 마음에 드는 책을 빌려보려고요.
아주머니: 오매, 이런 어린애들 데리고 도서관을 언제 왔다 갔다 해. 그리고 빌려보는 건 한계가 있어요. 애들도 집에 볼 책이 많이 있어야지요. 그리고 애들도 새로 나온 책을 더 좋아해!
아주머니는 정곡을 찌르는 말들로 내 논리를 반박하셨다. 사실 국문학을 전공했고 아이들에게 국어와 논술을 가르친 경험은 있어도, 정작 내 아이들 독서 지도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런 대책도, 마음의 여유도 없이 먹이고 재우고 씻기는 일에 급급했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아주머니가 나긋나긋 책을 읽어주시자 귀를 쫑긋하며 들었고 아름다운 동화 속 그림에 눈을 반짝거렸다. 세계 명작, 한국 전래동화, 그리고 유아용 영어 전집까지. 아주머니가 소개해준 책들은 한눈에 봐도 집에 들이고 싶은 전집이었다. 이 정도 전집은 최소한 집에 있어야 한다며 근거 없는 교육 철학이 생긴 것은 순식간이었다. 문제는 금액이었다. 몇 십만 원씩 하는 전집을 마음에 든다고 바로 살 수는 없었다. 고민하는 눈치인 내게 아주머니는 이야기를 꺼내셨다.
"있잖아요. 애기 엄마가 무슨 돈이 있어요. 집에 아이들 돌반지 있죠? 다른 엄마들은 그거 몇 개씩 팔아서 전집 사주고 그래요."
돌반지라. 당장 수중에 현금은 부족했지만 서랍 깊숙한 곳에 아이들 돌 반지는 가득한 것이 생각났다. 나는 순간 한치의 고민도 없이 홀린 듯 그 반지들을 꺼내 들고 와서, 아주머니와 함께 현금으로 환산하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우리 집 근처에 단골 금 거래소까지 두고 계셨다. 바로 그곳 주인에게 전화를 거시더니, 금반지 한 돈이 현재 얼마인지 금세 알아내셨다. 그렇게 나는 돌반지 몇 개와 동화책 전집을 맞바꾸었다.
남편이 퇴근할 시간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아차 싶었다.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돌반지를 팔아 전집을 산 내 이야기를 듣고는 이내 눈이 동그래졌고,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당시엔 돌반지를 갑자기 마음대로 팔았다는 생각에 남편과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전집을 사주길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때 산 책을 한 번 보고 다시는 들춰보지도 않았다면 씁쓸했겠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무한 반복해서 지금까지 보고 또 보고 있다. 그러니 그때 판 금반지, 아깝지 않다. 돌을 기념하여 주고받는 금반지 선물은 급할 때 요긴하게 쓰라는 의미도 있지 않은가. 그 뒤로 지금까지 다른 전집은 구매하지 않았다. 얼마 뒤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아주머니와도 연락이 끊겼다.
전집 구매에 즉흥적으로 돌반지를 팔 만큼 마음이 요동한 이유. 변명을 하자면 동화 전집은 내게 따스한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웅* 출판사 한국 전래 동화 전집'. 40권의 동화책과 40가지 이야기가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는 정다운 밤의 친구들이었다.
동화 테이프가 꽂힌 카세트를 누르면 '둥둥 두둥 두둥둥-'하며 음악이 울려 퍼졌다. 나도 배를 깔고 엎드려 동화책을 펼쳤다. 이 곡의 경쾌한 리듬과 함께 구성진 성우 아저씨의 목소리가 작은 방에 꽉 찼다. 그러면 나는 숨을 죽이고 동화책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갔다.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어떤 동화가 시작되는지 구분해주던 테이프 속 BGM을 기억하며. 한글을 그렇게 깨쳤던 것 같다. 성우 아저씨 목소리를 따라 책 속 활자를 더듬더듬 짚어가며.
누군가 내게 강제로 동화책을 읽어주지 않아서 자유로운 밤이었다. 누군가 내 옆에 누워 어린 나를 재워주지 않아서 설레는 밤이었다. 마음껏 동화를 듣고, 읽던 밤. 그렇게 스스로 이야기를 덮고 자던 밤이 나는 좋았다.
'둥둥 두둥 두둥둥-'으로 시작하던 당시 동화 테이프 속 BGM은 이후에 자라서도 몇 번 더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곡이며 제목이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나는 이 곡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포크 록 듀오, 사이먼 앤 가펑클에 대한 라디오 원고를 쓴 적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폴 프레더릭 사이먼(Paul frederick simon)과 아트 가펑클(Art garfunkel). 일을 떠나 이들의 노래가 참 좋아 글을 쓰고 찐 팬이 되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중에 우리나라에는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라는 제목으로 번안된 'Bridge over troubled water'나 1967년 마이크 니컬스 감독의 영화 '졸업'의 삽입곡인 'Sounds of silence'가 유명하다. 그런데 자료를 조사하다가 이들의 다른 노래, 'Mrs.Robinson'이란 곡을 듣게 되었다. 노래가 흘러나오자마자 그 순간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첫 소절이 '둥둥 두둥 두둥둥-'으로 시작하는 게 아닌가! 내 기억 속에 살던, 이름 모를 멜로디 하나의 태생이 밝혀지던 순간이었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 1968년 발표한 'Mrs.Robinson'은 이들의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 <Bookends>에 수록되어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Sounds of silence'와 함께 영화 '졸업'의 삽입곡이었던 이 노래는 주인공 벤자민(더스틴 호프만)이 자신을 유혹하던 로빈슨 부인을 빈정대는 내용이다. 노랫말만 생각하면 어떻게 이런 곡이 교훈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한국 전래동화 전집의 BGM이 되었는지 아이러니하긴 하다.
어찌 됐든 동화 전집으로 따스했던 밤의 기억은 경쾌한멜로디가 되어 내 안에 살고 있다. 아이들도 내 나이쯤 되면 지금 읽는 동화 전집을 그리워할까. 그때쯤 나는 돌반지까지 팔아 너희들 전집을 사줬다며 생색내고 있을까. 아이들과 수 없이 넘겼던 동화책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함께 나눈 밤의 이야기들은 따스한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기를. 내게 남은 한토막 멜로디처럼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