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3 시절, 수능을 몇 달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밤늦도록 독서실에 머무는 일은 주변 학부모나 친구들에게당연한 것이었다. 나 또한 그렇게 진이 빠지도록 공부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미 학교에서 야간 자율학습까지 버티다 온 내 몸은 소금에 절여진 배추 같았다. 밤 12시, 1시까지 몸을 웅크리고 앉아있던 곳. 칸막이로 꽉 막힌 독서실 책상 한편, 그곳에 앉아 내가 주로 했던 일은 한쪽엔 문제집을 펼쳐 놓고는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거나, 미래에 뭐가 되어 있을지 몰라 답답한 마음을 샤프로 끄적이던 일이지 공부가 아니었다. 그것도 힘들면 까무룩 잠이 들던가.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을 당시엔 카세트테이프로 들었다. CD플레이어가 막 보급되던 시기라, 대학생이었던 언니는 CD를 사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가방 속에는 언제나 은색의 워크맨이 들어있었다. 카세트테이프 하나만 딱 들어가던, 얇은 부피에 손바닥만 한 사이즈. 대학 입시를 앞두고 내가 좋아하던 세계의 부피와 크기는 그렇게 최소한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야, 어제 또 녹음한 거다. 얼마나 좋은데! 들어봐."
"크크, 야. 네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뭔가 하는 걸 처음 본다. 알았어. 들어볼게."
중학교 1학년. 쉬는 시간이 되자 나는 친구 H에게 집에서 가져온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건넸다. 그 테이프의 정체는 지금으로 따지면 불법 복사본이었다. 당시 내가 집에서 즐겨하던 짓은 아무것도 녹음되어 있지 않던 공테이프에 이 노래 저 노래를 이어 붙여 복사하는 것이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나는 부모님 방에 있던 전축 앞에 앉았다. 집에 있던 가요 테이프들을 모조리 꺼내놓고는 세상 심각하게 고민했다. H에게 어떤 노래를 전해줄 것인가. 심사숙고한 끝에 고른 노래 리스트를 먼저 종이에 적어두고, 그 리스트에 맞춰 테이프 속 노래를 찾는다. 왼쪽엔 앨범 원본을 꽂고 녹음하고자 하는 노래를 찾아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둔다. 오른쪽엔 공테이프를 꽂는다. 왼쪽의 재생 버튼과 오른쪽의 녹음 버튼을 동시에 누른다. 그리곤 희열을 느낀다.
작업이 완성되면 투명한 케이스에 노래가 녹음된 테이프를 조심스레 넣었다. H의 의사와 상관없이 순전히 내 취향대로 고른 노래들이었다.
H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나의 단짝이었다.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올라갔고 우린 늘 붙어 다녔다. 싸울 일이 거의 없던 우리였지만 좋아하는 가수가 서로 다르다는 점에서 종종 티격태격했다. H는 신승훈, 나는 김동률의 열혈팬이었다. 당시 김동률은 친구였던 서동욱과 전람회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내가 공테이프에 주로 담았던 노래들은 아마도 전람회의 곡이었던 것 같다. H는 내게 신승훈의 앨범을 이렇게까지 전도하지 않았기에, 결국 그녀는 김동률의 열혈팬이 되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좋아하던 전부를 친구와 나누고 싶던 시절.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라디오를 들으며, 성인 가요의 세계에 빠져있던 나는 친구에게도 알리고 싶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노래가 있노라고. 노래도 선물이 될 수 있노라고. 그렇게 좋아하던 세계의 부피와 크기를 풍선처럼 한껏 부풀릴 수 있었던 날들. 그때를 생각하면 눈이 부시기도, 마음 한 편이 아리기도 하다.
H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어떤 노래를 들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H와 나는 서로 다른 대학에 진학을 했고, 2000년대 중반 그녀는 갑자기 호주로 떠났다.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곳에서 새로 대학교를 다녔고, 직장을 잡았으며, 결혼을 했다. 그녀가 호주에서 혼자 겪었을 그 간의 일들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얼굴을 보지 못한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도 서로의 생일이나 명절, 새해가 되면 어제 만난 사이처럼 카톡을 주고받는다.
- 애들 재우고 너도 들어. 선물 ㅎㅎ
- 아하하. 전람회 2집! 얼마 만에 보는 사진인지.^^
- '마중가던 길' 들어봐. 좋다.
- 응, 너무 좋다.
지난 생일, H는 내게 선물이라며 전람회의 '마중 가던 길'을 들어보라고 했다. 그들의 2집 앨범 화보를 캡처한 사진과 함께. 주로 베이스를 연주하던 서동욱은 이 곡에서 어쿠스틱 기타를 잡고, 담담히 노래했다. 지금은 기업인이 되어 공식적으로는 음악을 하지 않는 서동욱의 목소리. 들을 때마다 친구 H가 생각난다.
널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지 아무도 모르게
낯익은 가로수 아름드리나무는 푸른데
날 스쳐가는데 가을바람은 예전 그 모습으로
늘 따뜻한 웃음 날 지켜주던 네 모습은
이제는 허물어져 아른거리는 기억 속을 더듬어도
난 생각이 나질 않아 그저 차가운 웃음만이
쌓여갈 뿐
난 이제 잊혀지겠지
<전람회 '마중가던 길'>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던 음악은 그 사람과의 추억을 덧입고 있다. 그래서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먼 거리에 있는 친구와는 언젠가 만날 날만을 막연하게 기약해야 하는 것이 늘 아쉽다. 그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친구를 마중하러 나가는 길을 상상해본다. 그 길 위에 서서 마주하고 있으면, 그동안 잊혀지고 허물어진 옛 기억들을 함께 복기해낼 수 있을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각자의 길을 오래 걸어 나왔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좋아하던 세계의 한가운데로 다시 걸어 들어갈 수 있을까. 삶엔 카세트테이프처럼 되돌려 감기 버튼이 없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