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지갑을 열었다

비 지스 'How deep is your love'(1977)

by 혜일

아홉 살. 경제관념이 생기는 나이인지 큰 아이는 현금이 들어오면 차곡차곡 지갑에 넣어두길 좋아한다. 그동안 모아 둔 세뱃돈과 주변 친척 어른들께 받은 현금이 지갑 속에 묵직하다. 자기 이름이 새겨진 통장도 있는데 아이는 돈을 그냥 갖고 있는 게 좋다고 한다. 그는 한 번씩 지갑을 열어 돈을 세어보면서 혼자 흐뭇해한다. 또한 그는 웬만해선 지갑을 잘 열지 않는다. 돈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난감도 사고 싶고 (불량식품처럼 엄마가 사주지 않는) 먹을 것도 사고 싶을 텐데 돈을 모으기만 할 뿐, 좀처럼 쓰질 않는다. 아이는 자주 아파트 장터에서 파는 닭꼬치를 먹고 싶어 한다. 그런데 당장 내가 현금이 없다고 하면, 아이는 제 동생에게 넌지시 이야기한다. "승호야, 네가 닭꼬치 좀 쏴라." 이런 짠돌이.


지난 주말, 다 같이 외출을 하려는데 큰 아이가 지갑에서 2천 원을 꺼내 겉옷 주머니에 챙겼다.


"현금은 왜 챙겨?"

"응, 승호 생일 선물 사주려고!"


나는 사뭇 놀랐다. 그러고 보니, 다음 날이 동생의 생일이었다. 12월에 태어난 작은 아이는 미리부터 정말 많은 축하를 받았다. 유치원에서는 11월에 생일인 친구들과 함께 지난달 말, 이미 축하 잔치를 했고 반 친구들로부터 각양각색의 생일 선물을 받았다. 생일인 친구가 있으면 그 친구를 위해 다른 원아 모두가 선물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가 생일잔치를 하고 집에 돌아온 날, 큰 가방에 가득했던 생일 선물은 자그마치 26개나 되었다. 그리고 생일 일주일 전에는 할머니가 보내주신 레고 블록이 도착했고, 생일 이틀 전에는 친가 식구들과 함께 생일 파티를 했으며, 생일 하루 전에는 교회에서도 축하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정작 아이의 생일 당일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차고 넘치는 생일 축하를 받은 터라,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사실, 모든 축하와 선물이 동생에게 집중될 때 옆에 있던 큰 아이의 마음은 조금 울적했으리라. 그런데 그 울적함을 이겨내고 동생에게 직접 선물 사줄 생각을 하다니. 그 발상이 기특했다. 아이는 엄마, 아빠 생일에는 카드를 써주거나 청소를 도와주는 것 등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비록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제 돈을 써서 선물을 사겠다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 대상이 동생이라니.




작은 아이가 태어날 무렵 큰 아이는 28개월이었다. 동생이 태어날 것을 대비해 아이는 두 돌 무렵부터 어린이집 생활을 시작했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아기였다. 조리원에서 2주간 몸조리를 한 후 집에 돌아온 날, 가장 두렵고도 기대되었던 것은 큰 아이의 반응이었다. 이 아이는 동생을 어떻게 대할까. 동생이 태어난 상황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큰 아이의 하원 시간, 드디어 2주 넘게 만나지 못해 그리웠던 아이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때 아이는 할머니 손을 붙잡고 집에 들어왔는데 현관문 앞에서 마주한 아이의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분명 반가운 표정인데 눈물이 글썽글썽했고, 내게 얼른 달려들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를 보고는 마음껏 좋아하지도 못하는 모습이 느껴졌다. 아이는 나와 떨어져 있는 동안 본능적으로 연습을 한 것 같았다. 의젓해져야 하는 형의 모습을.


하지만 큰 아이가 처음 동생이란 존재에 대해 적응하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아이는 누워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동생을 향해 인자한 형처럼 웃다가도, 곧바로 돌변하여 순식간에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다. 동생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퀴어 놓거나, 덩치 큰 모빌을 일부러 쓰러뜨려 덮치게 했다. 덕분에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된 작은 아이는 얼굴과 머리에 상처가 마를 날이 없었다. 동생에게 잘못하고도 큰 아이는 서러운 울음을 울었고 작은 아이는 위협적인 형에게 당하며 집안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어린 형제는 포개지기만 하면 그렇게 불협화음이었다. 남편이 오기 전까지 혼자 아이들을 돌보던 저녁 시간은 죽을 맛이었다.




그랬던 큰 아이가 이제는 제 동생을 챙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진짜 '형아'가 되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는 동생을 데리고 당당히 국민 가게, 다*소에 입성했다. 평소 같았으면 엄마인 내가 앞장섰겠지만 이번에는 아이들을 앞세우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그런데 두 아이는 선물을 고르는 데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큰 아이는 사실 나름대로 동생에게 사주고 싶은 선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작은 티라노사우르스 공룡 피규어였다. 자신이 전부터 봐 두었던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생은 형이 사주려고 하는 선물은 싫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고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국민 가게에는 물건들이 정말 많다. 작은 아이는 자신을 유혹하는 갖가지 장난감들 틈새에서 2천 원에 맞춰 고르려니 머리가 아픈 눈치였다. 아이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천 원짜리 플레이콘 두 봉지를 골랐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선물을 고른 동생. 귀여웠다.


큰 아이는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해진 2천 원을 펼쳐 직접 지불했고, 작은 아이는 형에게 받은 선물을 들고 좋아라 했다. 그리곤 살짝 쑥스러운 듯 형아, 고마워!라고 말하곤 앞서 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런데 동생의 뒤를 따르는 큰 아이 표정은 영 기뻐 보이지 않았다. 혹시 마음이 바뀌어 동생에게 쓴 돈이 아까운 걸까. 아니면 자기가 사주고 싶은 선물을 동생이 거부해서 화가 난 걸까.


"은호야, 왜 그래?"

"음... 승호 선물이 이걸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아."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큰 아이는 자신이 계획한 것만큼 동생에게 멋진 선물을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동그란 수수깡 같은 플레이콘은 주로 어린아이들이 쓰는 놀이 재료이니. 2천 원으로 살 수 있는 그럴듯한 선물이 얼마나 있는지, 아이는 처음 피부로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네 선물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충분히 좋은 선물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너 플레이콘 재밌어? 그걸로 뭐 만들 거야?"

"아이언 맨 만들 거야!"


엄마인 내게, 아이들이 사이좋게 재잘대는 목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멜로디이다. 하얀 가로수 조명 아래, 좁은 길을 장난치며 뛰어가는 아이들이 두 개의 음표 같다. 검고 동그란 아이들의 머리가, 사방으로 자유롭게 휘젓는 팔과 다리가 포개지며 화음을 만든다. 이제는 불협화음이 아닌, 아름다운 화음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AXtmaxuH5AQ

비 지스(Bee Gees) - 'How deep is your love'


비 지스의 'How deep is your love'. 아름다운 화음이 귀를 맴돈다. 비 지스는 70년대 후반,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OST로 디스코 열풍을 일으키며 전성기를 누린 그룹이다. 맏형 배리 깁(Barry Gibb)이 그의 쌍둥이 남동생들과 영국에서 처음 밴드 활동을 시작한 나이는 불과 아홉 살 무렵이었다. 동생들은 더 어린 꼬마들이었으니 형제가 다 같이 노래하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을까. 나중엔 막내 동생 앤디 깁(Andy Gibb)까지 합세해 사형제는 전 세계적으로 활동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 동생들은 맏형 배리 깁만 남겨둔 채, 병과 불의의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77년에 발표된 'How deep is your love' 역시,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OST 노래인데 디스코 곡은 아니다. 듣고 있으면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한 없이 빠져든다. 형제라서 더욱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 수 있었을까. 피는 물보다 진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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