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다는 것은
아이들이 집을 떠나 있는 오전 시간, 이웃 언니와 근처 카페에서 브런치 타임을 가졌다. 아메리카노와 프렌치토스트를 사이에 두고 편안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여러 가지 면에서 관심사가 비슷한 언니와 나는 점점 깊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교육, 가족, 글을 쓰는 것 등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나는 언니에게 나이 이야기를 했다. 이십 대 때 아득하게만 보였던 사십이란 나이는 '완성과 정착'의 이미지였다고.
어릴 적 상상한 사십 대는 잔잔한 항구에 잘 정박된 배의 모습이었다. 적어도 인생에 있어서 '방황'이란 어느 정도 정리된 나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꿈의 시작점에서 멀리 가지 못하고 여러 가지 선택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는 세상에 막 태어나 모든 게 처음인 햇병아리 같다고 말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언니는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처음인 게 맞다고 말이다. 엄마의 역할도 처음이고, 남편과 아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맞닥뜨리는 경험들이 모두 처음이라고. 글을 쓰는 것도 고민하는 과정이 있어야 배울 수 있고, 새로운 세계가 확장되는 것 같다고. 그러면서 내게 안심이 되는 한마디 말을 해주었다.
"잘하고 있어."
그 말에 고맙고 감사했다. 진심이 담긴 격려의 말은 언제나 용기가 된다. 그런데 언니가 건넨 '잘하고 있어'라는 말이 내게는 어쩐지 '자라고 있어'라고 들렸다. '잘한다'와 '자란다'의 발음이 비슷한 까닭일까. 언뜻 두 단어가 같은 의미로 느껴졌다.
'속성'이란 ‘빨리 이루어짐’을 뜻한다. 그런데 제대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속성'이란 것이 얼마나 통할까. 어떤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는 데는 시간 대비 효율적인 속성 학습도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대체로 '속성'이 통하지 않는 것이 인생인 것 같다. 그런데도 뭐든 빨리빨리 잘했으면 하는 마음은 종종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괴롭힌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아이들을 키우는 데 있어서 '빨리빨리'의 잣대를 들이댈 때가 많았다. 아이들이 잘 자고 잘 먹으면 키와 몸무게가 빨리 늘어날 거라 생각했다.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 금방금방 잘하게 될 줄 알았다. 내가 세운 계획을 이뤄가는 데 있어서도 단기간에 어떤 성과를 내려고 스스로를 다그치던 적이 많았다. 계획대로 진전이 잘 되지 않으면 힘이 빠졌다. 어떤 성과를 내어도 스스로에게 '잘했다' 칭찬하는 데 인색했고 '조금 더 잘하면 좋잖아'라며 더 높은 기준에 나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욕심을 부렸다.
하지만 삶은 ‘완성형’이 될 수 없고, 모든 인생은 각자 고유의 속도대로 자라 가는 ‘진행형’이다. 그러니 더딘듯해도 포기하지 않고 무언가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자체로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해 줘야겠다. 잘하고 있다고 말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잘하고 있다'는 칭찬의 말은 정말로 상대방을 '자라게' 한다고 믿는다.
결국, '자라고' 있으니 '잘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