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도 피부처럼 나이를 먹나 보다. 미용실에서 영양 클리닉을 받아도 그때뿐이다. 며칠 지나면 쉴 새 없이 머리카락이 끊어져 나오고, 금세 그 결은 푸석푸석해진다. 정수리 아래 방향으로 빗어내리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던 빗. 그 빗은 이제 내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가서는 이내 갈 길이 막혀 빠져나오기 벅차다. 숱은 적지만 뒤엉켜있던 머리카락 탓이다. 급기야 며칠 전에 빗이 부러지고 말았다. 머리카락을 빗다가 그만 '뚝'하고 부러진 것이다.
빗이 부러지자 마음속 전구에 필라멘트 하나도 꺼진 느낌이었다. 부러진 빗을 볼 때마다 허전했다. 왜 이리 상실감을 느낄까 생각해보니, 이 빗은 결혼을 하고 십 년 가까이 쓰던 것이었다. 그것도 매일매일. 빗이 놓여있던 자리는 안방 드레스룸 화장대. 빛도 들지 않는 가장 어두운 곳 한 구석에 빗을 꽂아두곤 했다. 하지만 눈 감고도 손만 뻗으면 바로 찾을 수 있을 만큼 빗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부러진 빗은 꿀색에 호피무늬를 가진 도끼빗이다. 물론 롤빗도 있고 꼬리빗도 여분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빗질이 쉽지 않아 진 마당에, 내 머리카락을 전담하고 있던 빗은 이 도끼빗 하나였다. 결혼하고 처음 산 빗은 지금까지 줄곧 내 차지였다. 우리 집엔 여자가 나 밖에 없고, 다른 세 남자들은 빗이 필요 없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러니 느끼지 못했을 뿐, 내겐 엄청난 가치가 있던 물건이었다. 부러지거나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나는 이 빗을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용했을 것이다. 빗이 이렇게 오래 쓸 수 있는 물건인지 미처 몰랐다.
아쉬운 대로, 부러진 호피무늬 도끼빗을 며칠 더 사용했다. 손잡이만 부러졌지 빗살은 멀쩡했기 때문이다. 궁상을 떨고 있는 나를 본 남편은 부러진 빗에 순간접착제를 붙이곤 테이프로 꼼꼼히 감아주었다. 복구된 빗은 손으로 만져보아도 꽤 튼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머리를 감고 빗질을 하자마자 그것은 다시 힘없이 툭 꺾이고 말았다.
새 빗을 하나 장만해야 했다. 기억을 돌이켜보니, 부러진 빗을 샀던 매장 브랜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인터넷으로 다른 빗을 사려고 보니 묶음으로 여러 개 팔거나 하나만 사면 배송비가 더 든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빗, 내가 쓰던 것 같은 빗이 없었다. 시간을 내어 갖가지 생활 용품을 파는 전문 매장과 대형 마트 두 군데를 돌았다. 빗은 많았다. 하지만 내가 찾는 '도끼빗'이 없을 줄이야. 결국 세 번째로 찾아간 다*소 매장에서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빗과 그나마 제일 비슷한 빗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가격은 단돈 오백 원. 빗이 이렇게 싼 물건인지 미처 몰랐다.
살림을 꾸려가다 보니 짐이 되는 것들은 대부분 그 쓸모가 묘연해진 것들이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늘어만 가는 물건들을 정리할 때면, 내가 처음 지불한 값을 따지기보다 그 물건의 쓰임새를 따지게 된다. 가격보다 가치를 우선시하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사면 십 년 이상을 쓰게 되는 도끼빗 같은 물건. 집 안을 둘러보면 내겐 이와 같은 존재들이 꽤 많다. 베란다에 늘 놓아두는 파란색 슬리퍼, 가구나 선반 먼지를 닦을 때마다 찾는 분홍색 걸레, 연필과 볼펜 등을 꽂아 둔 책상 위 머그컵, 식탁 의자에 걸쳐 두고 어깨가 시릴 때마다 입는 플리스 잠바 같은 것들. 이미 십 년을 넘겼거나 그 가까이 된 물건들.
가격으로만 따지면 보잘것없으나, 저마다 고유한 역할이 있어 유행과 상관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이다.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겠지. 세월이 쌓이면서 내 손에 익숙해져 버린 이유도 있겠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면서도 이것들을 버린다거나 다른 상품으로 대체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둘도 없고 딱 하나씩 뿐이어도 그걸로 족하게 되는 물건들이다.
새로 산 빗이 빛난다. 반짝이고 예쁜 모양이라서, 값이 비싸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제 역할을 잘하고 있기에 빛이 난다. 일주일 째 빗을 잘 쓰고 있다. 벌써 본전은 뽑았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이것도 십 년은 거뜬히 쓸 수 있을 것만 같다. 힘 조절만 잘한다면 말이다. 나도 그렇게 빛나는 사람이 되길 꿈꿔본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겉모습은 변할지라도, 고유한 제 빛은 숨길 수 없는 사람. 새해에는 그렇게 나만의 역할이 있는 자리에서 빗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