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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Jun 11. 2022

꽃이 떨어지지 않게 살아

엄마 생신날 저녁. 다음날까지 공휴일이라서 가족 모두 친정집에 느긋하게 모였다. 동생과 함께 식탁에 앉아있는데 엄마가 꽃병 하나를 꺼내 오셨다. 아담한 크기였지만 두께가 있어 묵직해 보였다. 꽃병 표면에는 빗살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그 모양이 어지럽거나 밋밋하지 않고 딱 보기 좋았다. 어디에 놓아두어도 시선을 끌만한,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진 크리스털 꽃병이었다.



"이 꽃병, 오랜만에 보네?"

"그래? 이거 삼촌이 엄마 생일에 선물로 준 거잖아."



엄마는 막내딸에게 받은 꽃다발을 풀며 한껏 기분 좋은 목소리로 이야기하셨다. 맞아, 그랬지. 내가 고등학생 때였나. 삼촌은 그때도 엄마에게 생일 선물을 주었는데. 그 당시 삼촌의 선물은 비틀즈 앨범이었다. 노란색으로 숫자 1이 크게 쓰여있던 CD 한 장. 오히려 그 비틀즈 앨범은 바쁜 엄마보다도 빈둥거리던 내가 많이 듣곤 했다.



삼촌. 제일 큰 누나에게 꽃병과 비틀즈 앨범을 선물할 줄 알았던 나의 삼촌은 참 다정다감한 사람이었구나. 오랜만에 마주한 꽃병 하나를 바라보며 한 사람을 가만히, 오롯이 추억했다. 암 투병 끝에, 삼촌은 지금의 나보다 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근데 삼촌이 이 꽃병을 주면서 엄마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

"누나, 이 꽃병에 꽃이 떨어지지 않게 살아."

 


꽃이 떨어지지 않게 살아. 엄마의 마음 깊은 곳에서 처음 길어 올려진 삼촌의 말. 삼촌은 엄마가 늘 꽃을 보며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지 않고 살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그 말이 내 마음 안에서도 오랫동안 반짝일 것 같았다. 눈앞에 놓인, 여전히 닳지 않은 꽃병처럼.



삼촌의 말을 미리 들었더라면 나는 엄마에게 더 자주 꽃을 사다 드렸을 텐데. 엄마의 지나간 시간을 더 화사하게 만들어드렸어야 했는데. 엄마는 이 예쁜 꽃병을 찬장 어딘가 깊숙이 간직한 시간들이 더 많으셨다. 아마도 엄마는 오랜 시간, 무채색 슬픔으로 뒤덮인 삶을 사셨겠지. 꽃을 보고도 아름답다 느끼지 못할 만큼.  




새벽 내내 비가 내렸고, 자면서도 나는 친정집 마당에 핀 꽃들을 걱정했다. 비가 오는 바람에 만개한 꽃들이 다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부모님은 신도시 아파트에 사시다가, 7년 전 이곳에 집을 지으셨다. 오 분만 걸어 나가면 모내기를 해놓은 벌판이 펼쳐져있고, 주변 동네는 친정집과 비슷한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아빠는 이 집이 완공되자마자 마당 담장 주변으로 장미 꽃씨를 가득 심으셨다.



이사 온 해가 지나고 마당 담장에 장미꽃이 활짝 핀 어느 날,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무슨 장미를 이렇게 열심히 가꾸셨어?"

"네 엄마가 꽃을 좋아하잖냐. 한 송이, 두 송이 사다 주는 것보다 이게 낫지 않냐? 허허허."



엄마를 향하신 아빠의 낭만적인 고백을 떠올리면 지금도 미소가 지어진다. 다행히 아침이 되자 비가 그쳤고 나는 오랜만에 마당의 꽃들을 구경했다. 커다란 분홍 장미들은 꽃잎이 떨어지긴 했지만 아직 탐스러웠다. 그 옆에 심긴 희고 붉은 꼬마 장미들은 앙증맞았다. 빗방울을 머금은 초록 잎사귀는 더욱 싱그럽게 보였다.



친정집은 이제 해마다 5월 말이면 장미 넝쿨 집으로 변신한다. 어느 날은 부모님도 모르는 청년 셋이 길을 가다 멈춰 서서 장미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담장 아래에서 사진을 찍더니 슬그머니 마당에 들어왔더란다. 그러더니 장난스럽게 마당에 누워 사진을 찍고 갔다고 하셨다. 친정집은 대문이 따로 없어, 누구나 마당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러다가 여기가 장미꽃 명소가 되는 게 아닌가.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냥 들어오게 놔뒀어?"

"어떠니. 꽃이 예뻐서 구경하는 건데.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꽃을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좋아."


마당에 함께 나온 엄마는 어느새 꽃가위를 들고 계셨다. 맑은 하늘 아래  친정집 마당은 온통 꽃천지였다. 나는 올 때마다 새로운 꽃들을 사귄다. 장미뿐만 아니라 2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단 동자꽃, 샛노랗고 키가 작은 달맞이꽃, 손으로 문지르면 취할 만큼 향이 강한 페퍼민트. 모두 엄마가 직접 심은 것이었다. 몇 년 후면 칠십이 다 되어가는 엄마. 하지만 여전히 나보다 부지런한 엄마. 엄마는 그렇게 아름다움을 심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꼬마 장미와 우단 동자꽃, 페퍼민트 가지를 잘라 내 손에 쥐어주셨다. 너도 꽃이 떨어지지 않게 살아.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대로 아름답다고 느끼며 살아. 엄마의 눈빛을 읽은 나는 기쁘게 꽃가지들을 모아 종이에 말았다. 엄마의 꽃 같은 마음을 가슴 한가득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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